누나가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기뻐서 나는 눈물이 아닌, 딸을 낳아서 어쩌냐는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내가 세상에 나오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단다. 눈이 작고 전체적으로 외모가 영 떨어지는 아이였음에도, 단지 그놈의 고추를 달고 있다는 게 그분들에게 그리도 큰 기쁨을 준 거였다.
살아오는 내내 어머니는 나만 편애하셨다. 난 편애에서 비롯된 각종 혜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남자’로 자랐다. 그런 나를 깨우쳐 준 분이 강준만 교수님이였다. 지역차별을 비롯해 모든 차별에 대한 항의를 날렸던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읽으면서 난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삶이 오히려 미안해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됐다. 그 후부터 짬짬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가해지고 있는지를 알았고, 그런 차별에 최소한 분노는 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2년 전, 여성희망캠페인 100인 기부릴레이의 이끔이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여성을 위한 일에 기여할 기회를 얻어서기도 하고, 십여 년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이 일만큼은 자신있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 또래 쯤 되는 여성이라면 굳이 무슨 주의자를 자처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기에, 대부분 흔쾌히 참여의사를 밝혀 주셨다.
올해 처음으로 완주를 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꼼수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참여를 독려한 것. 원래 돈 내는 일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걸 금기시했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을 따로 불러모아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은 모를지 몰라도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가해지는지 느끼게 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행사에 참여를 한다면 참여하는만큼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여한 여덟명이 완주에 큰 도움을 줬다. 물론 가장 큰 도움은 평소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던 필명 산사춘님에게서 나왔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남자로 태어나는 건 10억 정도를 갖고 세상에 나온 것과 같다.” 남성이 오히려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그 돈 다 어디 갔어?”라며 내 말을 비웃지만, 그들도 나처럼 여성학의 세례를 받는다면 “10억이 뭐냐? 100억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성학은 참 좋은 학문이다. 가장 도움이 되는 게 부부 금술이 좋아진다는 것. 설거지를 비롯한 집안일을 분담할 줄 아는 남편을 싫어하는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여성희망캠페인이 보다 많은 이에게 여성학의 기쁨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서 민 단국대학교 교수, 100인 기부릴레이 이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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