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였나? 엄마는 종종 나에게 흰머리를 뽑아 달라고 했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걸 왜 뽑으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나오는대로 검은 머리 사이에 그냥 있어도 안 흉한데 말이다.
작년이었다. 흰머리 좀 뽑아달라는 내 부탁에 아이는 재미있는 놀이라 생각했는지 흔쾌히 승낙했다. 처음엔 검은 머리를 너무 많이 뽑아서, 나중엔 재미없어서 아이는 금방 그만두었다.
흰머리를 그냥 두면 보기 싫다는 사십대의 내 엄마와 서글플 정도로 생각의 일치를 보는 나. 나이를 먹어 가면 이렇게 생각이 바뀌는 걸까?
과거에서 현재로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는 생각의 여정들을 따라가며 잠시잠시 머물게 되는 지점들, 바로 생각의 경계다. 그 경계를 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이 먹는 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또 하나의 경계에 선다.
결혼, ‘안할 수도’에서 ‘소중한 일상의 일부’로
코오롱아파트가 끝나고 사천고가가 보이는 한적한 이차선 도로변, 쓸쓸해 보이는 어느 건물. 이곳에는 화가의 작업실들이 있다. 동네와 나름 어울린다.
올해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가 김수영(38)씨는 십여 년 전만 해도 결혼하면 경제는 남편이 책임지고 아이를 낳고 살아야하고 자신도 그런 ‘일반적’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일반적 결혼 생활도 자신의 능력 밖에 있음을 삼십대를 통과하며 깨달았다. 더불어 결혼에 대한 생각도 차츰 바뀌었다.
“결혼해도 일반적으로 안 살아도 되고 자식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죠. 외국이라면 동거를 해도 되겠지만 한국에서는 동거한다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잖아요. 그럼 너무 불편할 거 같았어요. 이런 일에 그렇게 에너지 소모하며 살 필요가 있나 싶었죠.”
그러나 내일 모레 마흔을 앞둔 지금의 생각은 또 다르다. 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왜 사람들이 모두 일반적인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지 이해하는 수준에 와 있다.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제는 일상, 삶을 느끼며 살기, 남편, 행복, 좋아하는 대로 작업하기, 이런 생각들이 그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다. 경계를 넘어가는 중이다.
여자, ’화장한 외모’에서 ‘하는 짓이 예쁜’으로
경성고 사거리 근처에 있는 디자인업체의 수장이자 4인 가족의 가장인 박희동(45)씨는 나이를 먹어가며 좋아하는 여자의상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화장한 걸(girl)들에게 눈길이 갔는데 이젠 곱게 늙어 가는 여자가 좋아요. ’척’하지 않는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음에 와 닿아요. 또한 외모 보다는 하는 짓이 예쁜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껴요."
40대 아저씨다운 솔직한 멘트다. 그는 하루하루 사는 게 무척 재미있다. 어디서 일확천금이 생겨 놀고 먹고 살면 재미없을 거 같다. 젊었을 때는 빨리 돈 벌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알맞은 긴장, 스트레스, 아이의 짜증, 이런 게 있어서, 출근할 데가 있고 일이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 될 때가 있어서 좋다.
과거에는 돈, 마누라, 집이 기본적으로 소유해야 할 목록이라 생각했던 그는 이제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삶의 지혜, 참다운 삶, 행복을 지향하는 가치로 삼고 있다.
관심사, ’내 가족 우선’에서 ‘시민으로서의 책임’으로
경성고 벽돌담을 따라 황금색 은행나무 잎들이 뒹구는 길을 건너면 <패밀리마트>가 있다. 높은 건물 없고 평범해서 안정감을 주는 그 골목을 걷다보면 작은 사거리 모퉁이에 이름이 특이한 호프집이 있다. <어쭈구리> 사장님 이윤주(56)씨는 연남동 14통 통장이다.
“작은 애가 네 살 때 ‘새마을 부녀회’에 들어갔지. 그 일을 하다가 통장직을 맡게 되었어. 그때가 40대였어. 봉사가 뭔지 동네 인구가 얼마인지, 마포구에 동이 몇 개나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는 통장을 하면서 지역, 도시, 나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라라니, 애국심인가? 그는 시민정신을 말한다.
“나라에 바라는 건 너무 많고 시민으로서의 작은 일들을 소홀히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해. 법보다 무서운 게 도덕이고 양심이지.”
한장에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봉투 아까워 검은 봉지에 음식물 버리면서 커피값은 자기가 내겠다고 큰소리치는 주부, 목욕탕 가서 물을 ‘물’쓰듯 하는 사람, 승용차로 아이들 통학시켜주는 부모, 부부간의 주도권이 어느 한쪽의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왔다갔다하는 세태에 대해서까지 그는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성향, ‘성과주의 리더’에서 ‘따뜻한 여행작가’로
“책을 쓰는 일이 예전엔 나와 먼 얘기인 줄 알았어요. 이젠 나에게도 가까운 일이구나 생각해요. 책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내면을 이제는 이해해요. 나도 그런 욕구 느끼거든요. 나를 표현해내는 도구로요.”
보석감정사인 김영애(43)씨가 쓰고 싶은 건 어떤 책일까?
아버지 영향으로 일등에 대한 강박을 갖고 살았던 그는 간호사 시절에도 긴박한 상황에 적응해야하는 응급실 근무를 좋아했다. 단기 집중과 성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흔 즈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참 얕다’는 자각을 처음하게 되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나 고민하게 되었고 그가 내린 답은 여행이었다.
동남아시아와 미국 등을 여행하며 풍요로워지고 넓고 깊어지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특정지역에 대한 여행책, 공정여행에 관한 책, 관광이나 유적지 소개 이상의, 사람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론리 플래닛을 뛰어넘는 그런 여행책을 쓰고 싶다.
글 김혜련 사진 최형원
[김혜련님은 매일 조금씩 글을 쓰며 소설습작 중이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공부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를 불어로 번역했다.]
본 글은 아줌마들이 만드는 지역잡지 동네한바퀴 더(발행 줌마네/창간호 2009년 겨울 연남동)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09년 한국여성재단 자유공모사업 '지역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아줌마 전문기자단 양성과 소통매체 개발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지역매체(제작비 일부 지원)로써, '줌마네'가 근거하고 있는 마포지역을 시범지역으로 주민들을 위한 욕구파악과 그에 맞는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개인화된 구성원들의 소통화 네트워킹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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