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나눔 서포터즈에서 정기기부자로  
  한국여성재단과 아름다운 인연 이어가는 김세희씨  

기부란,

남을 돕겠단 마음을 그저 일상 속에서 한 걸음 옮기는 것!

  

 

"예전부터 누군가를 돕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취업을 하면서 정기기부를 하게 됐죠. 
기왕이면 문화나눔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공연도 보고 봉사도 하며 작은 사랑의 실천을 배웠던 여성재단을 통해 기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점심시간,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여의도 빌딩숲에서 오늘 인터뷰 주인공 김세희씨(24)를 만났다. 올해 초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녀는 또렷한 말투에 사회초년병답게 반짝거리는 눈빛이었다.
세희씨는 워낙 공연관람을 좋아해서 평소 여러 포털 사이트나 카페 등을 통해 공연관련 소식들을 주의 깊게 보는 편이었단다. 그러다 우연히 한국여성재단에서 문화나눔 서포터즈를 뽑는다는 공지를 보게 됐다고. 당시엔 학생이었는데 ‘그늘진 이웃을 위해 애쓰는 공익활동가들과 문화나눔의 경험이 없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공연관람티켓을 제공’한다는 재단의 문화나눔 사업이 그녀에게 의미 깊게 다가왔다. 
세희씨는 6개월간 문화나눔 서포터즈로 활동하게 되었고 활동 기간 동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며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주변에서 다른 분들이 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명한 단체들도 많이 접했어요. 전 기왕이면 제가 문화나눔 서포터즈로 활동 했었던 한국여성재단에 기부를 결심하게 된거죠.” 
그렇게 세희씨는 한국여성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정기기부를 시작하게 됐다. 기부를 시작한 지는 아직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기부’라고 하면 왠지 거창하게만 느껴져 망설이는 사람에게 그녀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 이 만 원을 아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시작 하라고 말한다.
“저 역시 입사한 지 얼마 안돼서 시간적 여유가 많진 않지만 앞으로 봉사도 하고 싶고 정기기부도 꾸준히 할 생각 이예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 금액도 조금씩 늘려가고 싶고요.” 

 

문화나눔 서포터즈로 이어진 한국여성재단과 인연의 끈을 ‘기부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는 김세희씨. 기부에 대한 마음을 결심에 그치지 않고 취업과 동시에 실천에 옮긴 세희씨를 보며 ‘기부’란 남을 돕겠단 마음을 그저 일상 속에서 한 걸음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단 생각이 든다.

 

- W.C기자단 김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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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생활이 된 한국여성재단 정기기부자 송현직, 이은미씨 부부

내 것을 조금 줄이면

훨씬 더 큰 것을 나눌 수 있어요

 

구름이 두텁게 해를 가리고 내려 앉아 있어 낮 두시의 거리가 어둑신하다. 여름이 지나고 기온이 급하게 내려가는 통에 거리에는 제법 두꺼운 옷들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쌀랑한 날씨 탓인지 자그만 까페 한 구석을 자리한 노란 스탠드 불빛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진다. 테이블 앞으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해사한 얼굴의 젊은이가 다가선다. 


“안녕하세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쑥스러운 듯 인사를 하며 다가서는 그의 이름은 송현직(33). 개구쟁이 꼬마 같이 장난스런 미소를 가진 그는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여성재단의 정기기부자이다.  

그가 처음 한국여성재단을 접한 것은 2007년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티비를 보다가 모금방송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소개된 모녀의 딱한 사연을 보고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움을 주고 싶어 한국여성재단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일 년 간 한국여성재단의 정기기부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기부가 잠시 중단되었다.

“반찬 세 개 먹을 것 두 개로 줄이고, 30평 살 것 20평으로 줄이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잖아요.”
내 몫을 다투는 세상에서 내 것을 줄이거나 희생하면서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생각이다. 그에게 이런 삶을 실천하게 만드는 데에는 신앙의 힘이 크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같은 성당에서 만난 아내 이은미씨와 작년에 화촉을 밝혔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데에 뜻을 함께했다.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제안하여 다시 한국여성재단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가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꼭 도와야 한다는 게 제 아내의 지론입니다. 엄마가 흔들리면 가정이 힘들어지니까요.”
그런 아내와 함께 그는 특별히 빈곤한 여성,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들의 복지를 위해 한국여성재단이 힘써 주길 바란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가 살아야 가정이 살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재단이 투명하게 열심히 뛰면서 일할 것을 믿어요. 주변에는 쪽방촌 같은 곳에 직접 기부를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좀 더 큰일을 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어서 한국여성재단을 택했습니다.”

조금은 잘난 척한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데 시종일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느냐며 민망해하는 그를 보며, 작은 성취에도 이내 자랑삼고 거만해지는 우리자신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진다. 그의 말처럼 좋은 것들은 늘 ‘나누면 커진다’. 같이 나눈 따뜻한 마음으로 인해 잠시 쌀쌀한 날씨도 잊어버린 봄날 같은 훈훈함이 가득한 자리였다.

 

- 한국여성재단 W.C기자단 박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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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기뻐서 나는 눈물이 아닌, 딸을 낳아서 어쩌냐는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내가 세상에 나오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단다. 눈이 작고 전체적으로 외모가 영 떨어지는 아이였음에도, 단지 그놈의 고추를 달고 있다는 게 그분들에게 그리도 큰 기쁨을 준 거였다.

 

살아오는 내내 어머니는 나만 편애하셨다. 난 편애에서 비롯된 각종 혜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남자’로 자랐다. 그런 나를 깨우쳐 준 분이 강준만 교수님이였다. 지역차별을 비롯해 모든 차별에 대한 항의를 날렸던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읽으면서 난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삶이 오히려 미안해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됐다. 그 후부터 짬짬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가해지고 있는지를 알았고, 그런 차별에 최소한 분노는 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2년 전, 여성희망캠페인 100인 기부릴레이의 이끔이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여성을 위한 일에 기여할 기회를 얻어서기도 하고, 십여 년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이 일만큼은 자신있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 또래 쯤 되는 여성이라면 굳이 무슨 주의자를 자처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기에, 대부분 흔쾌히 참여의사를 밝혀 주셨다.

 

올해 처음으로 완주를 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꼼수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참여를 독려한 것. 원래 돈 내는 일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걸 금기시했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을 따로 불러모아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은 모를지 몰라도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가해지는지 느끼게 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행사에 참여를 한다면 참여하는만큼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여한 여덟명이 완주에 큰 도움을 줬다. 물론 가장 큰 도움은 평소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던 필명 산사춘님에게서 나왔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남자로 태어나는 건 10억 정도를 갖고 세상에 나온 것과 같다.” 남성이 오히려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그 돈 다 어디 갔어?”라며 내 말을 비웃지만, 그들도 나처럼 여성학의 세례를 받는다면 “10억이 뭐냐? 100억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성학은 참 좋은 학문이다. 가장 도움이 되는 게 부부 금술이 좋아진다는 것. 설거지를 비롯한 집안일을 분담할 줄 아는 남편을 싫어하는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여성희망캠페인이 보다 많은 이에게 여성학의 기쁨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서 민  단국대학교 교수, 100인 기부릴레이 이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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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세계여성의 날’기념행사 준비로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분주하다. 활동가들의 야근불빛과 이어지는 자원봉사자들과 방문객의 발걸음에 뜰도 따라 분주하다.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계절을 탐색하던 상사화 새싹이 친구들을 불러내자 튤립도 따라 나왔다.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봄을 느끼기에는 이른 추위에 올해는 새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상사화 새싹을 만나지 못 할 줄 알았는데 새삼 입춘절기의 정확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길고, 춥고, 무겁던 겨울의 끝자락과 봄이 만나는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38세계여성의 날의 기원

1908년 미국에서 여성의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행진이 시작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당에 소속된 여성들이 1909년 2월 마지막 일요일에 여성선거권 획득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여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코펜하겐에서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국제여성의 날’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고, 확대되어 나가면서 1922년부터 매년 3월8일에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하는 관행이 국제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성인권보호와 성평등 가치의 중요성을 주요한 국제사회가치로 존중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유엔은 1975년 3월8일을 ‘국제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이후 매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유엔사무총장의 기념축사를 통해 여성인권에 관한 유엔차원의 결의를 전 세계에 선포하고 있다.

1908년 3월8일 미국여성들의 행진을 기원으로부터 세계 각국과 유엔에서 진행하고 있는 ‘38세계여성의 날’을 중국 등 몇 개의 나라에서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여성들에게 꽃을 선물하며 전 국민적 축제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한국여성대회

한국에서는 1920년 중반부터 열렸으나 일제의 탄압 속에서 명맥이 유지되지 못해 간헐적으로 진행되어오다 1948년 이후 사회적 격변 속에서 맥이 끊겼다. 이후 1985년 전국14개 여성단체들의 ‘제1회 여성대회’를 시작으로 1987년 한국여성단체 연합이 창립된 후 지금까지 한국여성단체연합 주관으로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는 한국여성운동의 성과를 공유하고 대중적으로 확산하며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 담아내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며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문화축제로 성장해 왔다.

 

 

 2010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 ‘여성의 한표로, 희망을 현실로’

올해로 26회를 맞는 ‘한국여성대회’를 앞두고, 100년 전 여성들이 외쳤던 생존권과 인권 그리고 성평등 문제를 다름없이 오늘, 우리의 차가운 현실로 만나고 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 경제위기속에서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데 가장 먼저 해고되는 노동자는 여성이며, 모든 연령의 여성들이 취업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가정 내에서 육아나 가사노동의 1차 책임자 역시 여성이다. 함께 벌어야만 하는 어려운 살림살이에 맞벌이 가족이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 속에서 여성은 일과 가족생활을 모두 잘 해야 하는 슈퍼우먼이 되기를 요구받고 있다. 남성들은 과로사의 위협을 느끼며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가족과 함께 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자유와 해방 그리고 귀하고 존엄함을 상징하는 보라색은 여성운동의 상징색이다. 매년 3월8일을 즈음하여 보라색과 함께 열리는 한국여성대회가 올해는 오는 3월6일 오후 1시부터 이화여대 대강당과 주변 거리에서 지방선거가 있는 해인만큼 ‘여성의 참여로, 희망을 현실로를 슬로건으로 다채롭게 진행 된다.

친구, 가족, 동료들과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축제에 함께 참여하여 긴 겨울의 옷을 벗고 존엄한 자신을 확인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현실로 만들 약속을 하자. 그리고 오는 6월2일 지방선거에 투표할 것과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볼 것을 첫 약속으로 만들어 보자.

추위 속에 봄이 있음을 알고 먼저 나온 상사화새싹의 용기가 봄을 불러오듯 ‘38세계여성의날’ 기념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1908년 여성들이 외쳤던 요구를 2010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쳐야 하는 슬픈 현실을 바꿔내자.

여성과 남성이 모두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함께 아이를 양육하고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사회, 빈곤과 폭력 없는 안전한 세상, 여성과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는 이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김금옥(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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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나? 엄마는 종종 나에게 흰머리를 뽑아 달라고 했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걸 왜 뽑으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나오는대로 검은 머리 사이에 그냥 있어도 안 흉한데 말이다.

작년이었다. 흰머리 좀 뽑아달라는 내 부탁에 아이는 재미있는 놀이라 생각했는지 흔쾌히 승낙했다. 처음엔 검은 머리를 너무 많이 뽑아서, 나중엔 재미없어서 아이는 금방 그만두었다.

흰머리를 그냥 두면 보기 싫다는 사십대의 내 엄마와 서글플 정도로 생각의 일치를 보는 나. 나이를 먹어 가면 이렇게 생각이 바뀌는 걸까?

과거에서 현재로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는 생각의 여정들을 따라가며 잠시잠시 머물게 되는 지점들, 바로 생각의 경계다. 그 경계를 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이 먹는 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또 하나의 경계에 선다.

 

결혼, ‘안할 수도’에서 ‘소중한 일상의 일부’로

코오롱아파트가 끝나고 사천고가가 보이는 한적한 이차선 도로변, 쓸쓸해 보이는 어느 건물. 이곳에는 화가의 작업실들이 있다. 동네와 나름 어울린다.

올해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가 김수영(38)씨는 십여 년 전만 해도 결혼하면 경제는 남편이 책임지고 아이를 낳고 살아야하고 자신도 그런 ‘일반적’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일반적 결혼 생활도 자신의 능력 밖에 있음을 삼십대를 통과하며 깨달았다. 더불어 결혼에 대한 생각도 차츰 바뀌었다.

“결혼해도 일반적으로 안 살아도 되고 자식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죠. 외국이라면 동거를 해도 되겠지만 한국에서는 동거한다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잖아요. 그럼 너무 불편할 거 같았어요. 이런 일에 그렇게 에너지 소모하며 살 필요가 있나 싶었죠.”

그러나 내일 모레 마흔을 앞둔 지금의 생각은 또 다르다. 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왜 사람들이 모두 일반적인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지 이해하는 수준에 와 있다.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제는 일상, 삶을 느끼며 살기, 남편, 행복, 좋아하는 대로 작업하기, 이런 생각들이 그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다. 경계를 넘어가는 중이다.

 

여자, ’화장한 외모’에서 ‘하는 짓이 예쁜’으로

경성고 사거리 근처에 있는 디자인업체의 수장이자 4인 가족의 가장인 박희동(45)씨는 나이를 먹어가며 좋아하는 여자의상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화장한 걸(girl)들에게 눈길이 갔는데 이젠 곱게 늙어 가는 여자가 좋아요. ’척’하지 않는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음에 와 닿아요. 또한 외모 보다는 하는 짓이 예쁜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껴요."

40대 아저씨다운 솔직한 멘트다. 그는 하루하루 사는 게 무척 재미있다. 어디서 일확천금이 생겨 놀고 먹고 살면 재미없을 거 같다. 젊었을 때는 빨리 돈 벌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알맞은 긴장, 스트레스, 아이의 짜증, 이런 게 있어서, 출근할 데가 있고 일이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 될 때가 있어서 좋다.

과거에는 돈, 마누라, 집이 기본적으로 소유해야 할 목록이라 생각했던 그는 이제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삶의 지혜, 참다운 삶, 행복을 지향하는 가치로 삼고 있다.

 

관심사, ’내 가족 우선’에서 ‘시민으로서의 책임’으로

경성고 벽돌담을 따라 황금색 은행나무 잎들이 뒹구는 길을 건너면 <패밀리마트>가 있다. 높은 건물 없고 평범해서 안정감을 주는 그 골목을 걷다보면 작은 사거리 모퉁이에 이름이 특이한 호프집이 있다. <어쭈구리> 사장님 이윤주(56)씨는 연남동 14통 통장이다.

“작은 애가 네 살 때 ‘새마을 부녀회’에 들어갔지. 그 일을 하다가 통장직을 맡게 되었어. 그때가 40대였어. 봉사가 뭔지 동네 인구가 얼마인지, 마포구에 동이 몇 개나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는 통장을 하면서 지역, 도시, 나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라라니, 애국심인가? 그는 시민정신을 말한다.

“나라에 바라는 건 너무 많고 시민으로서의 작은 일들을 소홀히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해. 법보다 무서운 게 도덕이고 양심이지.”

한장에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봉투 아까워 검은 봉지에 음식물 버리면서 커피값은 자기가 내겠다고 큰소리치는 주부, 목욕탕 가서 물을 ‘물’쓰듯 하는 사람, 승용차로 아이들 통학시켜주는 부모, 부부간의 주도권이 어느 한쪽의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왔다갔다하는 세태에 대해서까지 그는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성향, ‘성과주의 리더’에서 ‘따뜻한 여행작가’로

“책을 쓰는 일이 예전엔 나와 먼 얘기인 줄 알았어요. 이젠 나에게도 가까운 일이구나 생각해요. 책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내면을 이제는 이해해요. 나도 그런 욕구 느끼거든요. 나를 표현해내는 도구로요.”

보석감정사인 김영애(43)씨가 쓰고 싶은 건 어떤 책일까?

아버지 영향으로 일등에 대한 강박을 갖고 살았던 그는 간호사 시절에도 긴박한 상황에 적응해야하는 응급실 근무를 좋아했다. 단기 집중과 성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흔 즈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참 얕다’는 자각을 처음하게 되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나 고민하게 되었고 그가 내린 답은 여행이었다.

동남아시아와 미국 등을 여행하며 풍요로워지고 넓고 깊어지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특정지역에 대한 여행책, 공정여행에 관한 책, 관광이나 유적지 소개 이상의, 사람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론리 플래닛을 뛰어넘는 그런 여행책을 쓰고 싶다.

글 김혜련 사진 최형원

[김혜련님은 매일 조금씩 글을 쓰며 소설습작 중이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공부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를 불어로 번역했다.]

 

본 글은 아줌마들이 만드는 지역잡지 동네한바퀴 더(발행 줌마네/창간호 2009년 겨울 연남동)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09년 한국여성재단 자유공모사업 '지역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아줌마 전문기자단 양성과 소통매체 개발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지역매체(제작비 일부 지원)로써, '줌마네'가 근거하고 있는 마포지역을 시범지역으로 주민들을 위한 욕구파악과 그에 맞는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개인화된 구성원들의 소통화 네트워킹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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