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 도 사

 

 

사랑하는 박영숙 선생님! 저희들을 한결같이 따뜻하게 사랑해주셨던 박영숙 선생님!

선생님의 갑작스런 소천은 여성·환경단체들을 포함해 선생님을 직간접으로 알고 있는 시민사회의 많은 활동가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암으로 투병 중이시라는 소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막상 선생님의 부음을 대하게 된 저희들은 마음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선생님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늘 저녁의 이 시간이 더 안타깝게 느껴짐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선생님을 모시고 참으로 행복하게 일했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1995년이었던가요? 리우회의가 끝나고 의제21이 한국사회에 회자되던 어느날, 선생님은 당시 환경시민단체의 중견실무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유정길, 민만기, 김제남, 여진구, 그리고 저였습니다. 서울시가 지방의제21을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는 말씀과 함께, 이렇게 몇사람이 모여 당시 명칭이 확정되지 않은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구성과, 이를 통해 서울특별시의 지방의제21을 만들 로드맵을 함께 그려가자고 제안하셨지요.

그 이후 우리 다섯사람은 1주일에 한번씩, 때로는 저희끼리, 때로는 선생님과 함께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규약을 만들고, 창립 위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등, 지속가능한 발전을 구현하기 위한 최초의 민-관 거버넌스를 창출한다는 설레임으로 정말 열성을 다해 일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저로서는 무척이나 행복했었지요. 당시 서울YMCA에서 환경담당 간사로 일하고 있던 저는, 거대단체의 관료적 장벽에 부딪혀 환경운동을 마음껏 펼쳐볼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터라,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확신과 열정을 지니신 선생님을 모시고 새로운 일감을 개척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새로운 일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장벽들과 부딪혔습니다. 특히 당시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전무했던 서울특별시 공무원들의 경직된 태도와 권위의식, 오랫동안 고착된 갑-을관계 의식,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몰이해로 사사건건 부딪침이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평소에 늘 온화하고 따뜻하셨던 선생님은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너무나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지요. 평소에 소통과 대화와 신뢰적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지만, 원칙과 철학이 끝내 통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실 때 선생님의 ‘단호함’이 결기있게 드러나는 모습을 저희들은 놀람과 감동으로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서로가 의미를 충족시키고 행복해지는 길을 일관되게 모색하는 분이셨지만, 동시에 옳다고 믿는 것을 우직하게 발언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1년여동안 녹색서울시민위원회를 만들고 또 제1기의 위원회를 함께 하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끝내 돌파하여 ‘서울의제21’이라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저희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경험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박영숙 선생님!

이제 떠나가시면 저희들은 선생님이 참으로 많이 그리울 겁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당신의 신앙과 운동의 실천을 통해 보여주신 그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참 아름다웠던 여성 지도자로서의 우뚝 서신 삶은 저희들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던 선생님! 부디 저희들의 가슴 깊이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 계셔서, 선생님께서 염원하셨던 세계 -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뛰놀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도정에 한 치의 게으름이나 주저함 없이, 저희들이 한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사랑의 채찍으로 살아계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부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의 평화를 마음껏 누리시길 머리숙여 기도 드립니다.

 

 

 

남부원(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바침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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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숙 선생 추모사

 

 

박영숙 선생님.

영정 사진 속에서 여전히 환하게 웃고 계시는 선생님께 추모의 인사를 드리게 되니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할지 가슴이 먹먹합니다. 몇 년 전, 선생님께 YWCA가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드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한국Y에서 받은 훈련이 선생님께 가장 큰 자산이셨다고, 그래서 Y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함께 해주시겠노라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되니 더 많은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나 큽니다.

언제 뵈어도 늘 밝고 열정적이고 활기차 보이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저희들은 더욱 슬프고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은 한국전쟁이 온 나라를 휩쓸고간 50년대 중반 이화여대에서 수학하시던 시절 YWCA를 만나셨고, 한국사회의 재건을 위해 Y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시고 졸업과 함께 Y 실무활동가로서의 삶을 택하셨습니다. 특별히 올바른 가치관과 비전을 가진 청년들을 키우고, 활동의 장을 열어주고 지원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으셨음을 저희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 이희호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한국YWCA연합회의 총무로 취임하신 선생님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고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셨습니다. 여성들의 문제에 Y가 적극 나서서 선구자적 여성단체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Y 활동의 핵심을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여성 지도력, 특별히 청년들의 리더십양성과 소외받는 이들의 인권회복에 두고, 항상 앞장서 행하셨습니다.

임기를 마치신 후에는 더 넓은 사회로 나가셔서 환경운동가로, 인권운동가로, 정치인으로 헌신하시면서 Y의 운동과 바른 역할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시고 지원해 주셨습니다.

 

48년 전 제가 처음 서울Y에서 실무활동가로 일할 때 연합회의 총무로 처음뵈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고 소신있고 덕있는 여성운동가의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습니다. Y 밖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서 탄압받은 운동가의 가족으로 선생님과 다시 만났습니다. 저의 남편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을 때, 어려운 상황에 있던 구속자가족들을 고 안병무 박사님과 함께 돌보시면서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따뜻하고 깊은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정치인으로서도, 운동가로서도, 투쟁을 앞세우기보다는 따뜻한 밥을 우선 챙겨 먹이시는 살림꾼이셨습니다.

 

 

선생님.

참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올곧게 행하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세상이라는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사셨고, 교회를 통해, 단체들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참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선생님은 참으로 복된 신앙인이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에 가신 선생님,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도록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소망하셨던 정의와 평화, 생명살림의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아있는 후배들이 힘을 모아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어주신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갈 것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환한 미소로 늘 저희와 함께 하셨던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국YWCA연합회 부회장 김 형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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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 시대 가장 위대하셨던 현장 운동가, 큰 스승 박영숙 선생님!

선생님은 사회 약자들을 위한 일, 진정한 사회발전을 위한 일이면 여성, 환경, 인권, 민주화, 노동 등 어떤 영역의 일이든 ‘내일이다’ 생각하며 최선을 다 하셨던 분입니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셔서 품으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며 불태우셨던 분이였기에, 선생님 곁은 항상 따스했고 감동의 전율이 느껴졌나 봅니다.

 

제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은 그분을 만난 것이고 곁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세 가지로 기억합니다.

(1) 진정성 있는 지도자: 행사장, 회의 일찍오셔서 끝까지계시고 열심히 참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 BMW 등 환경실천 철저히)

(2) 따듯하면서도 엄격한 운동가: 연말이면 활동가들 집으로 초대해 손수 지으신 밥 챙겨 먹이시던 분. 신입활동가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셨고 후배 활동가들을 참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촛불집회,사대강 집회 등에서 뵈면 활동가들 식사는 하였나? 옷들은 단단히 입었나? 옷이 얇다...)

(3) 큰 스승이셨으며 동시에 겸손한 학습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신 매우 겸손하신 분.- 차 드릴까 여쭈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날 챙기느냐’시며 물 한잔도 본인이 직접 갖다 드셨고,

병문안 가면, 왜 왔냐 시간 아껴서 일해야지. 작은 것이라도 사서 가면, 날 위해 돈 쓰지마라 대표로서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하셨죠 (어려운 곳에 돈 쓰라)

끊임없이 학습하며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활동들을 만들고 이끄셨던 분입니다.‘즐겁게 활동하자,전체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운동판 짜자!’ 최근 병상에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열심히 하실 수 있었냐고..“일을 맡을 때 마다 첫 연인을 만나 데이트하듯 두근거리는 마음과 각오로 최선을 다하셨다”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보내드리면서 선생님의 큰 사랑이 담긴 환한 웃음을 우리 모두 오래도록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자주 하셨던 말씀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올바르게 최선을 다하는 저희들 되겠습니다. 곁에 계셔서 참 행복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성환경연대 50대 으뜸지기 남미정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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