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느 별에서 만나 함께 좋은 세상을 도모할까요?

- 위대한 사회운동가 박영숙 선생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이건 아닙니다.

이건 현실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 박영숙 선생님,

이건 아닙니다.

도저히 우리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안 계신 이 세상,

선생님이 더 이상 우리의 부빌 언덕이 되고, 우리의 나침반이 되고,

우리의 회초리가 되지 않는 세상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그 엄혹한 군사독재시절에도,

그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피와 눈물의 투쟁 속에서도

늘 우리의 부빌 언덕이셨습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에서 저는 변호인 중의 한사람으로,

선생님은 대책위원회위원장으로 만난 이래

선생님은 저의 활동을 늘 지지하는 응원자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댁에서 자주 베풀어주신 그 작은 향연, 그 맛난 음식,

그 따뜻한 이야기들을 잊지 못합니다.

풍찬노숙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민주화의 동지들,

인간화의 길을 함께 한 여성운동가들, 사회운동가들에게

선생님은 늘 위로와 공감의 그늘을 드리우는

큰언니 큰 누이 같은, 어머니 같은, 느티나무 같은 어른이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차별을 넘어 온 인간이 평등한 대동세상을 열어가고,

힘들고 억울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희망세상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에서도 선생님은

늘 우리의 나침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원칙은 소나무처럼 엄격하고,

그 실천은 버드나무처럼 유연하였습니다.

가슴 속 뜨거운 용광로를 간직하셨지만 늘 소탈하고 겸허한 웃음으로

우리 후배들을 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선생님만 함께 계신다면 그 어떤 어려운 길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늘 바른 방향을 가르키는 나침반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돌이켜 보면, 우리가 혹여 잘못된 길을 들어서거나 방심해 질 때는 어김없이 회초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를 거치는 동안에도

변함없는 후원자로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기간에도 열심히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되고 자문위원회를 조직하는데 여성비율이 낮다는

기사를 보고 저에게 혼을 내셔서 제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라도 후배들의 잘못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그런 회초리를 맞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한 시대의 스승을 잃었습니다.

한 시대의 좌표를 상실했습니다.

엄동설한의 추위보다 서슬 퍼렇고 엄혹하기 그지없던 군부독재 시절,

민주주의와 인권, 여성과 약자의 이름을 대변하며

이 땅의 많은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주시던, 곱디곱던 그 모습,

이제 어디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요?

지난 반세기 한 ‘자연인’이면서, 한 자식의 ‘어머니’이기 전에,

억압받던 민중을 대변한 ‘민주주의’의 이름이었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인권’의 이름이었고,

여성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여성’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큰 이름을 대체할 누구를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돌이켜보면, 선생님께서 걸었던 한 걸음, 그 한 걸음에는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사랑, 인간에 대한 한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오셨기 때문이겠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영전 앞에서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며,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선생님이 직접 함께 걸으며 보여주신

그 진정한 사랑과 용기와 희망과 실천의 힘 때문일 것입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 여성과 약자의 권익, 생태 환경을 위해

헌신하신 선생님께 진 그 큰 빚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그 큰 그늘을 드리워주는 어른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제 보내드립니다.

선생님께서 못다 이룬 꿈은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 모두 선생님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어느 별에서 다시 만나 또 좋은 세상 도모할 그날까지

편히 잠드소서.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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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계에서 故박영숙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 모음입니다.

 

추모글은 계속 올라올 예정입니다.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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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믿기지 않습니다.

며칠 전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모르고 금방 일어나시면 그동안의 활동들을 후배들이 잘 알도록 기록하고 또 남겨야지 했는데 너무나 허망합니다.

곁에서 지켜 보면서 열정적이면서도 그렇게 품위있게 운동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뵙던 날, 선생님은 당신이 필요한 자료들을 손수 복사하시고 계셨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말씀드리자, ‘힘든 일도 아니고 내가 필요해서 하는 일인데 이런 일은 내가 해야지, 당신들은 더 중요한 일들 해야지’ 그때부터 선생님은 저의 친구들에게 자랑거리였습니다.

선생님!

살아가면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가까이 가게 되면 시간이 지나게 되면, 그들에게 실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반대였습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존경하고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4대강이나 새만금 현장에 가장 먼저, 가장 앞에서 함께 계시고 끝까지 목소리를 내어 주셨습니다. 워크숍이나 공부하는 자리에도 가장 열심히 참석하셔서 게으른 저희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선생님!

저는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하는 활동들을 처음에 못 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박영숙 선생님의 활동들을 보시면서 그런 분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 뜻을 이어서 열심히 하라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열렬한 지지자가 되셨습니다. 지금은 저 뿐만 아니라 저희 부모님께도 선생님은 존경과 자랑의 대상이시기도 합니다.

선생님!

저는 몽당연필만 보면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연필을 손수 깎고 볼펜에 끼어 정성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쓰시는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삶과 일치하는 운동의 모습들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저의 아니 우리의 큰 언덕이자 감히 닮고 싶은 분이자 자랑이셨습니다.

선생님!

전 아직 선생님의 영전에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더 길어지셨을 텐데 어서 보내 드리자 하면서도 아직 선생님의 삶과 생각들을 담지도 못했는데....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삶과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당신을 보내 드리게 되어 죄송하고 속상합니다.

선생님이 일궈 오신 것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생애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행운이고 축복이고 큰 선물이었습니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아름답고 멋졌던 우리 박영숙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걸으셨던 생명과 평화와 평등을 위한 그 길,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활동하라 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부족함 많은 후배지만 그 뜻을 따라 열심히 최선을 다해 그 길에 함께 하겠습니다.

평화롭게 가세요.

사랑합니다.

선생님께서 강선생이라고 부르셨던 희영이가 드립니다.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 강희영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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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여기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저보다는 더 긴밀하게 박영숙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신 분들이십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오늘 말씀을 전해야 하시는 분은 이해동목사님이십니다. 이해동목사님과 이종옥사모님은 7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선생님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신 신앙의 동지이셨을 뿐더러, 지난 1년의 투병 생활동안 거의 매일 선생님을 찾아주시고 기도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해동목사님을 믿고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이 자리를 빌려 목사님과 사모님께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안병무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만, 박영숙선생님과의 만남은 10년 전 향린교회에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중요한 약속이 없는 주일은 언제나 예배에 참석하셨고, 저를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과묵하신 편이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다가, 투병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만남이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 2개월 전에는 제가 찾아오기 하루 전날 병실 창문을 통해서 본 생생한 모습 -타자들은 이를 환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만- 선생님께서는 이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였고 그때의 감동이 너무나 생생하였기에 이를 함께 볼 수 없었다는 사실에 매우 안타까워 하셨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파노라마의 장면처럼 이를 자세히 묘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얀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와 여러 만장을 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삼일절 독립 만세를 부르는 모습과 같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의 부름이 가까웠음을 읽었고, 이는 마치 성서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수많은 의인들의 합창 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3주 전 봄 햇살이 창가에 그득하게 밀려오는 오후 혼자 병실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침대를 창가쪽으로 옮기어 놓고 봄 햇살을 즐기며 누워계셨습니다. 그때 운 좋게도 두 시간 가까이 선생님의 손을 잡고 지난 온 삶의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던 은총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한번쯤은 자랑 이야기를 할만도 한데, 자랑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고, 오히려 가족들과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였음을 후회하시고, 특히 아들 재권에게 그리고 며느리 박은정교수와 조카 김정임양에게 더 깊은 애정을 표현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 자리를 떠나오면서 목사가 갖는 사제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에 깊이 감사했습니다. 그건 모든 사람들은 각자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길을 걸어오지만, 사제는 그런 마음 속 깊이 담겨 있는 고백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한 길을 잠시나마 함께 걸어보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뵌다고 한 것이 그만 그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지난 일요일 저녁 급하게 입원하신 시간은 향린교회가 60주년 행사를 무사히 마친 후였습니다.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는 평생 그렇게 사셨듯이 끝까지 교회에 짐을 지우시지 않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바로 그 다음날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하는 한반도평화통일 컨퍼런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아틀란타를 향해 출발했고, 비행기 안에서 입원 소식을 들었고, 회의 도중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비보를 듣고 급하게 돌아와야 했지만, 회의에서 제게 맡겨진 책무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또한 선생님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로서 마지막 임종기도를 하지 못하였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만약 몇 시간이라도 일찍 돌아가셨다면 어쩌면 저는 이 자리에 서지 못할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제게는 평생동안 깊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혹자는 이런 일들을 우연으로 얘기하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삶도 이어지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하느님 안에서 선생님과 저 사이에 영혼의 교감이 작용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신 17일 그 날은 바로 남편이자 생의 멘토였던 안병무선생과 신앙의 동지 12명이 60년 전 향린교회의 첫 예배를 드린 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박영숙선생님께서 그간 우리에게 보여주신 시대를 앞서 나아가시는 깊은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역사 변혁에 앞장 서 오신 놀라운 용기와 지도력 그리고 각자에게 베푼 은혜를 감사하며 이 아침에 모였습니다.

부군 안병무선생은 한국적 해방신학인 민중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세계적인 성서학자로서 특히 마가복음 연구를 통해 2천년 서구신학이 만들어놓은 담론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신 분이십니다. 역사적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 이성과 철학적 담론인 말씀으로서가 아닌 민중 해방을 향한 실천적 사건으로 바라보도록 그 해석의 중심축을 옮기셨고, 전태일님의 죽음 사건을 통해 오흘로스 민중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역설하시면서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교회를 역사 변혁의 중심에 나서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민중 가운데서도 특히 어머니 선천댁을 통해 여성 이해에 대한 새로운 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더 오래된 사본인 원 마가복음은 오늘 우리가 읽은 16장 8절로 마칩니다. 그 이후는 후대에 첨가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써진 복음서로 예수의 부활의 몸을 말하는 세 개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빈 무덤만을 말하고 부활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고지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끝내고 맙니다. 흔히 문학적 기법에서 말하는 오픈엔딩 열린 끝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 갔는지 아니 갔는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매우 모호한 표현으로 그 끝을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안선생님의 즐겨하는 표현대로 말한다면 ‘각자가 스스로 결단해야 하는 미래를 향한 열린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보인 것입니다.

예수의 삶을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가 각기 독특한 신학적 관점을 갖고 있고, 부활 증언에 있어서도 처음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숫자나 그 장면 묘사가 다 각각 다릅니다만,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건 첫 번째 부활의 목격자는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 여성이 누구였든지간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역사의 담지자는 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여성은 사람을 셀 때의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남성 유대인들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매일 기도를 통해 감사했습니다. 이런 차별 문화와 억압의 구조 속에서 복음서는 남성 제자들의 몰이해와 무력함을 고발하고 여성 제자들의 숨어 있는 담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밑바닥 생활을 했던 한 여성이 결혼지참금으로 준비했던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귀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일을 말하고 있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이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로 인도한 일을 말하고 있고, 딸의 병 고침을 바랐던 한 이방여인에게 예수는 ‘자식에게 줄 빵을 개들에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는 모욕적이고 매몰찬 거절에도 불구하고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답함으로 남성 예수를 멋지게 한방 먹이는 얘기를 전하면서 이 여인을 통해 굶주린 이방인 4천명을 먹이는 급식기적 이야기를 전함으로 이방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는 주역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4개의 복음서는 동일하게 죽음의 자리에까지 스승과 함께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남성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오직 여성들만이 십자가의 곁을 지켰고, 새벽의 미명을 뚫고 예수 무덤을 찾아 나섰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은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다시금 만날 것이다라는 얘기를 들은 여성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놀랐다는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라고 하는 현장 곧 투쟁과 고난의 아픔을 피할 수 없는 그 현장에서 다시금 예수의 뒤를 따라 역사 변혁의 민중 운동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이를 기록한 마가가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가 그때 바로 전해지지 않았는냐?는 반문에 대한 임기응변적 답변으로 여성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의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박영숙선생님을 비롯하여 이희호여사님이나 박용길장로님과 같은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볼 때,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남성들보다 더 두려움을 많이 탄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감성에 치우친 편견일 뿐, 실제 역사 변혁에 있어 남성들을 움직인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실제 역사에 있어서는 이 여성들이 두려워서 입을 닫았던 것이 아니라 남성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두려워한 남성제자들이 꺼려하여 이를 무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여성들이 먼저 갈릴리로 갔고 그들을 통해 예수 운동이 다시 시작했고, 여기에 뒤늦게 남성제자들이 어쩔 수 없이 동참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을 깍아 내리기 위한 시도를 끊임없이 하여 온 것입니다.

박영숙선생님과 같이 한 여성의 삶의 이야기가 언론의 전체 한 면을 차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여성들의 삶을 남성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한 여성 신학자가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이렇게 얘기한 것을 기억합니다. 왜 여성들은 세계 역사를 논하고 정치를 논하고 우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는가? 왜 남성들에게 이런 영역들을 맡겨놓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전 이 자리에 참여한 여성들이 이제는 남성 지배의 역사 곧 폭력에 기초한 힘의 역사를 끝장내고, 사랑에 기초한 포용과 상생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여성은 성적 관점이 아닌 젠더의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이라고 하지만, 어렸을 때 부모님이 겪은 폭력의 트로우마에 갇혀 있는 어떤 여성 지도자들은 권력을 잡게 되면 더 큰 폭력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가끔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박영숙선생님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 박영숙선생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을 기린다면 갈릴리로 가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는 억눌린 민중들이 살아가는 변두리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역사 변혁은 변두리로부터 일어나지 결코 중앙에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빈 무덤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무덤의 비어있는 그 공간은 바로 우리들의 투쟁의 이야기로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삶에 지치고 소외된 사람들이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서는 희망과 연대의 이야기로 채워 나가야할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에 처음 부임하여 가진 교회 수련회에서 유언장쓰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영숙선생님께서 매우 진지한 자세로 이를 쓰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이 드신 분들에게 유언장을 권고하면 대부분이 나중에 쓰겠다고 이를 미루십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유언장을 미리 쓰도록 매년 권고합니다만, 젊은 분들은 내시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거의 내지 않으십니다. 박영숙선생님은 작년에 이를 다시 고쳐 쓰셨고 이에 기초하여 장례절차를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꼭 유언장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죽음학을 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두 자녀가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릅니다. 동시에 참석자들이 미리 받은 봉투를 열자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죽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번데기라는 육체의 탈을 벗고 영혼의 나비가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사망아!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죽음아! 네가 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 하며 죽음을 뚫고 일어서는 부활의 능력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향해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영숙선생은 평생의 신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최종의 순간까지 현역으로 사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의 삶을 본받아 모두 현역으로, 청년 자유인의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박영숙선생님께서 향린교회에 기증하신 유산은 앞으로 여성계 대표와 가족들이 참여하는 이사회를 조직하여 선생님의 뜻을 계속 이어갈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어지는 오늘의 장례 절차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향린교회 목사 한문덕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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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도 사

 

 

사랑하는 박영숙 선생님! 저희들을 한결같이 따뜻하게 사랑해주셨던 박영숙 선생님!

선생님의 갑작스런 소천은 여성·환경단체들을 포함해 선생님을 직간접으로 알고 있는 시민사회의 많은 활동가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암으로 투병 중이시라는 소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막상 선생님의 부음을 대하게 된 저희들은 마음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선생님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늘 저녁의 이 시간이 더 안타깝게 느껴짐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선생님을 모시고 참으로 행복하게 일했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1995년이었던가요? 리우회의가 끝나고 의제21이 한국사회에 회자되던 어느날, 선생님은 당시 환경시민단체의 중견실무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유정길, 민만기, 김제남, 여진구, 그리고 저였습니다. 서울시가 지방의제21을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는 말씀과 함께, 이렇게 몇사람이 모여 당시 명칭이 확정되지 않은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구성과, 이를 통해 서울특별시의 지방의제21을 만들 로드맵을 함께 그려가자고 제안하셨지요.

그 이후 우리 다섯사람은 1주일에 한번씩, 때로는 저희끼리, 때로는 선생님과 함께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규약을 만들고, 창립 위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등, 지속가능한 발전을 구현하기 위한 최초의 민-관 거버넌스를 창출한다는 설레임으로 정말 열성을 다해 일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저로서는 무척이나 행복했었지요. 당시 서울YMCA에서 환경담당 간사로 일하고 있던 저는, 거대단체의 관료적 장벽에 부딪혀 환경운동을 마음껏 펼쳐볼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터라,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확신과 열정을 지니신 선생님을 모시고 새로운 일감을 개척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새로운 일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장벽들과 부딪혔습니다. 특히 당시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전무했던 서울특별시 공무원들의 경직된 태도와 권위의식, 오랫동안 고착된 갑-을관계 의식,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몰이해로 사사건건 부딪침이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평소에 늘 온화하고 따뜻하셨던 선생님은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너무나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지요. 평소에 소통과 대화와 신뢰적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지만, 원칙과 철학이 끝내 통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실 때 선생님의 ‘단호함’이 결기있게 드러나는 모습을 저희들은 놀람과 감동으로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서로가 의미를 충족시키고 행복해지는 길을 일관되게 모색하는 분이셨지만, 동시에 옳다고 믿는 것을 우직하게 발언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1년여동안 녹색서울시민위원회를 만들고 또 제1기의 위원회를 함께 하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끝내 돌파하여 ‘서울의제21’이라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저희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경험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박영숙 선생님!

이제 떠나가시면 저희들은 선생님이 참으로 많이 그리울 겁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당신의 신앙과 운동의 실천을 통해 보여주신 그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참 아름다웠던 여성 지도자로서의 우뚝 서신 삶은 저희들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던 선생님! 부디 저희들의 가슴 깊이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 계셔서, 선생님께서 염원하셨던 세계 -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뛰놀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도정에 한 치의 게으름이나 주저함 없이, 저희들이 한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사랑의 채찍으로 살아계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부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의 평화를 마음껏 누리시길 머리숙여 기도 드립니다.

 

 

 

남부원(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바침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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