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영숙 선생 추모사

 

 

박영숙 선생님.

영정 사진 속에서 여전히 환하게 웃고 계시는 선생님께 추모의 인사를 드리게 되니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할지 가슴이 먹먹합니다. 몇 년 전, 선생님께 YWCA가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드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한국Y에서 받은 훈련이 선생님께 가장 큰 자산이셨다고, 그래서 Y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함께 해주시겠노라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되니 더 많은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나 큽니다.

언제 뵈어도 늘 밝고 열정적이고 활기차 보이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저희들은 더욱 슬프고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은 한국전쟁이 온 나라를 휩쓸고간 50년대 중반 이화여대에서 수학하시던 시절 YWCA를 만나셨고, 한국사회의 재건을 위해 Y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시고 졸업과 함께 Y 실무활동가로서의 삶을 택하셨습니다. 특별히 올바른 가치관과 비전을 가진 청년들을 키우고, 활동의 장을 열어주고 지원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으셨음을 저희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 이희호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한국YWCA연합회의 총무로 취임하신 선생님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고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셨습니다. 여성들의 문제에 Y가 적극 나서서 선구자적 여성단체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Y 활동의 핵심을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여성 지도력, 특별히 청년들의 리더십양성과 소외받는 이들의 인권회복에 두고, 항상 앞장서 행하셨습니다.

임기를 마치신 후에는 더 넓은 사회로 나가셔서 환경운동가로, 인권운동가로, 정치인으로 헌신하시면서 Y의 운동과 바른 역할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시고 지원해 주셨습니다.

 

48년 전 제가 처음 서울Y에서 실무활동가로 일할 때 연합회의 총무로 처음뵈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고 소신있고 덕있는 여성운동가의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습니다. Y 밖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서 탄압받은 운동가의 가족으로 선생님과 다시 만났습니다. 저의 남편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을 때, 어려운 상황에 있던 구속자가족들을 고 안병무 박사님과 함께 돌보시면서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따뜻하고 깊은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정치인으로서도, 운동가로서도, 투쟁을 앞세우기보다는 따뜻한 밥을 우선 챙겨 먹이시는 살림꾼이셨습니다.

 

 

선생님.

참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올곧게 행하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세상이라는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사셨고, 교회를 통해, 단체들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참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선생님은 참으로 복된 신앙인이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에 가신 선생님,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도록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소망하셨던 정의와 평화, 생명살림의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아있는 후배들이 힘을 모아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어주신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갈 것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환한 미소로 늘 저희와 함께 하셨던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국YWCA연합회 부회장 김 형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

박영숙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 시대 가장 위대하셨던 현장 운동가, 큰 스승 박영숙 선생님!

선생님은 사회 약자들을 위한 일, 진정한 사회발전을 위한 일이면 여성, 환경, 인권, 민주화, 노동 등 어떤 영역의 일이든 ‘내일이다’ 생각하며 최선을 다 하셨던 분입니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셔서 품으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며 불태우셨던 분이였기에, 선생님 곁은 항상 따스했고 감동의 전율이 느껴졌나 봅니다.

 

제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은 그분을 만난 것이고 곁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세 가지로 기억합니다.

(1) 진정성 있는 지도자: 행사장, 회의 일찍오셔서 끝까지계시고 열심히 참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 BMW 등 환경실천 철저히)

(2) 따듯하면서도 엄격한 운동가: 연말이면 활동가들 집으로 초대해 손수 지으신 밥 챙겨 먹이시던 분. 신입활동가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셨고 후배 활동가들을 참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촛불집회,사대강 집회 등에서 뵈면 활동가들 식사는 하였나? 옷들은 단단히 입었나? 옷이 얇다...)

(3) 큰 스승이셨으며 동시에 겸손한 학습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신 매우 겸손하신 분.- 차 드릴까 여쭈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날 챙기느냐’시며 물 한잔도 본인이 직접 갖다 드셨고,

병문안 가면, 왜 왔냐 시간 아껴서 일해야지. 작은 것이라도 사서 가면, 날 위해 돈 쓰지마라 대표로서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하셨죠 (어려운 곳에 돈 쓰라)

끊임없이 학습하며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활동들을 만들고 이끄셨던 분입니다.‘즐겁게 활동하자,전체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운동판 짜자!’ 최근 병상에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열심히 하실 수 있었냐고..“일을 맡을 때 마다 첫 연인을 만나 데이트하듯 두근거리는 마음과 각오로 최선을 다하셨다”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보내드리면서 선생님의 큰 사랑이 담긴 환한 웃음을 우리 모두 오래도록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자주 하셨던 말씀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올바르게 최선을 다하는 저희들 되겠습니다. 곁에 계셔서 참 행복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성환경연대 50대 으뜸지기 남미정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

박영숙 선생님을 그리며

 

저는 선생님을 생각할 때면 성경에 나오는 생명의 나무가 떠오릅니다. 한국의 척박한 땅에서 진정성이라는 뿌리와 성실이라는 기둥, 그리고 열정이라는 가지와 잎으로 선생님은 여성과 환경, 민주화 운동의 숲을 일구셨습니다. 손수 차린 밥으로 수십 명의 후배 활동가들을 초대해 배불리 먹이시고 격려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살림과 돌봄의 윤리를 머리가 아닌 마음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웁니다. 4대강을 막으시려고 시청광장에서 이포대교에서 뜨거운 뙤약볕을 피하지 않으시고 젊은 활동가와 함께 하셨던 선생님, 교육이나 워크샵때는 가장 먼저 나와 계시고 일을 하실 때는 이 일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셨던 선생님.

 

제가 박영숙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생 때 여성환경연대에서 인턴을 하면서 였습니다. 인턴으로서 제가 처음 한 일은, 단체의 역사와 박영숙 대표님에 대해 공부하는 것 이었습니다. 녹색연합 공동대표,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한국환경 사회정책연구소 이사장,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페어트레이트코리아 이사직 등을 수행하셨던 선생님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 나라의 환경운동의 역사와도 같았습니다. 환경과 여성,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가치를 함께 고민해 본 적 없었던 제게, 선생님의 삶은 이런 가치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일관성있게 추구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교과서와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결코 텍스트 속의 위인으로 갇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해 겨울 자서전을 내실 때 이미 70대 중반이신 선생님을 보며, 내심 이제는 짐을 내려 놓으시고 당신을 위해 조금 편안한 삶을 사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살림정치 여성행동을 조직하셨으며, 아시아 빈곤 여성의 자립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아시아 위민 브리지 두런두런’을 창립하시고, ‘살림이’재단을 통해 새로운 시민단체들을 돕고 지원하는 일을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해 하셨습니다. 새로운 씨앗이 움트는 데 가장 필요한 햇빛과 물이 무엇인지를 오랜 현장 경험으로 터특하신 선생님다운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61세에 새로운 공부에 도전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시대정신의 한복판에서 현역으로 계셨던 선생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존엄을 보여주시고 시민사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 저희는 아직 선생님을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활동하라고 하신 선생님의 유언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그 뜻을 남겨주시고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빕니다. 선생님이 일생을 거쳐 뿌린 씨앗들을 시민사회 곳곳에서 뿌리를 내고 꽃을 피우고 아름드리 나무로 키워내겠습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언니이자 선배이자 스승이신 박영숙 선생님, 사랑합니다.

 

 

 

여성환경연대 20대 으뜸지기 정규리 드림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

고(故)박영숙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추모사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고(故)박영숙 선생님은 이 꿈을 좇아,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일, 이 땅의 여성들이 요구하는 역할에 평생 열정을 바치시고, 5월 17일 새벽 영면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평양에서 출생하시어 떠나신 날까지 정의와 평등, 인권과 환경, 그리고 여성과 생명의 편에서 의로운 리더로 사셨습니다. 1955년 YWCA에서 처음 사회참여를 시작한 선생님은 한반도의 역사적 격변기 반세기동안 환경단체와 여성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를 설립하셨고, 세상을 떠나시던 날까지도 한국여성재단 고문, 여성환경연대 으뜸지기, 미래포럼 이사장, 살림이재단 이사장, 여성평화외교포럼 이사장, 살림정치여성행동 공동대표, 아시아 위민브릿지 두런두런 이사장으로 일하시던 현역 활동가이셨습니다.

 

싸울 때는 치열하게 싸우시고, 온 세상을 보듬을 만큼 넓은 품으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안아주시며, 변화에 앞장서는 후배 리더들을 위해서는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내가 뭘 하면 좋을까?’라시며 해결책을 함께 찾으시고, 평생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시며 생명사랑과 환경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선생님은 실천하는 지성의 대표이자 큰 언니셨습니다. 늘 미소와 기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후배를 이끄시던 선생님은 부드러운 권위와 카리스마의 상징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생님이 며칠동안 밤까지 새워가며 손수 장만하여 주신 푸짐하고 맛깔난 음식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2010년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목토시 수백 개를 뜨셨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북한에 보내지 못하게 되자 몹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크신 어른 한 분을 잃었습니다. 남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 지속가능한 지구환경, 민주화를 너머 평화와 통일을 만드는 일 등,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많은 과제들은 오롯이 여기 남은 이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들 가슴에, 그리고 이 땅의 딸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살아계실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조형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