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여기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의 대부분은 저보다는 더 긴밀하게 박영숙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신 분들이십니다. 특히 이 자리에서 오늘 말씀을 전해야 하시는 분은 이해동목사님이십니다. 이해동목사님과 이종옥사모님은 7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부터 선생님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신 신앙의 동지이셨을 뿐더러, 지난 1년의 투병 생활동안 거의 매일 선생님을 찾아주시고 기도로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해동목사님을 믿고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이 자리를 빌려 목사님과 사모님께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안병무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람입니다만, 박영숙선생님과의 만남은 10년 전 향린교회에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중요한 약속이 없는 주일은 언제나 예배에 참석하셨고, 저를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과묵하신 편이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다가, 투병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만남이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한 2개월 전에는 제가 찾아오기 하루 전날 병실 창문을 통해서 본 생생한 모습 -타자들은 이를 환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만- 선생님께서는 이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였고 그때의 감동이 너무나 생생하였기에 이를 함께 볼 수 없었다는 사실에 매우 안타까워 하셨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파노라마의 장면처럼 이를 자세히 묘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얀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와 여러 만장을 들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 지나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삼일절 독립 만세를 부르는 모습과 같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의 부름이 가까웠음을 읽었고, 이는 마치 성서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수많은 의인들의 합창 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3주 전 봄 햇살이 창가에 그득하게 밀려오는 오후 혼자 병실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침대를 창가쪽으로 옮기어 놓고 봄 햇살을 즐기며 누워계셨습니다. 그때 운 좋게도 두 시간 가까이 선생님의 손을 잡고 지난 온 삶의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던 은총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한번쯤은 자랑 이야기를 할만도 한데, 자랑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고, 오히려 가족들과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하였음을 후회하시고, 특히 아들 재권에게 그리고 며느리 박은정교수와 조카 김정임양에게 더 깊은 애정을 표현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 자리를 떠나오면서 목사가 갖는 사제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에 깊이 감사했습니다. 그건 모든 사람들은 각자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길을 걸어오지만, 사제는 그런 마음 속 깊이 담겨 있는 고백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임한 길을 잠시나마 함께 걸어보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찾아뵌다고 한 것이 그만 그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지난 일요일 저녁 급하게 입원하신 시간은 향린교회가 60주년 행사를 무사히 마친 후였습니다.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는 평생 그렇게 사셨듯이 끝까지 교회에 짐을 지우시지 않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바로 그 다음날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하는 한반도평화통일 컨퍼런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아틀란타를 향해 출발했고, 비행기 안에서 입원 소식을 들었고, 회의 도중 하느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비보를 듣고 급하게 돌아와야 했지만, 회의에서 제게 맡겨진 책무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 또한 선생님의 깊은 배려가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로서 마지막 임종기도를 하지 못하였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만약 몇 시간이라도 일찍 돌아가셨다면 어쩌면 저는 이 자리에 서지 못할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제게는 평생동안 깊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혹자는 이런 일들을 우연으로 얘기하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삶도 이어지는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하느님 안에서 선생님과 저 사이에 영혼의 교감이 작용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신 17일 그 날은 바로 남편이자 생의 멘토였던 안병무선생과 신앙의 동지 12명이 60년 전 향린교회의 첫 예배를 드린 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박영숙선생님께서 그간 우리에게 보여주신 시대를 앞서 나아가시는 깊은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역사 변혁에 앞장 서 오신 놀라운 용기와 지도력 그리고 각자에게 베푼 은혜를 감사하며 이 아침에 모였습니다.

부군 안병무선생은 한국적 해방신학인 민중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세계적인 성서학자로서 특히 마가복음 연구를 통해 2천년 서구신학이 만들어놓은 담론에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신 분이십니다. 역사적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 이성과 철학적 담론인 말씀으로서가 아닌 민중 해방을 향한 실천적 사건으로 바라보도록 그 해석의 중심축을 옮기셨고, 전태일님의 죽음 사건을 통해 오흘로스 민중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을 역설하시면서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교회를 역사 변혁의 중심에 나서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민중 가운데서도 특히 어머니 선천댁을 통해 여성 이해에 대한 새로운 눈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더 오래된 사본인 원 마가복음은 오늘 우리가 읽은 16장 8절로 마칩니다. 그 이후는 후대에 첨가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써진 복음서로 예수의 부활의 몸을 말하는 세 개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빈 무덤만을 말하고 부활한 예수를 만나려면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고지로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끝내고 맙니다. 흔히 문학적 기법에서 말하는 오픈엔딩 열린 끝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에 갔는지 아니 갔는지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여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매우 모호한 표현으로 그 끝을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안선생님의 즐겨하는 표현대로 말한다면 ‘각자가 스스로 결단해야 하는 미래를 향한 열린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보인 것입니다.

예수의 삶을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가 각기 독특한 신학적 관점을 갖고 있고, 부활 증언에 있어서도 처음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숫자나 그 장면 묘사가 다 각각 다릅니다만,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그건 첫 번째 부활의 목격자는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 여성이 누구였든지간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역사의 담지자는 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여성은 사람을 셀 때의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남성 유대인들은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음을 매일 기도를 통해 감사했습니다. 이런 차별 문화와 억압의 구조 속에서 복음서는 남성 제자들의 몰이해와 무력함을 고발하고 여성 제자들의 숨어 있는 담대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밑바닥 생활을 했던 한 여성이 결혼지참금으로 준비했던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귀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일을 말하고 있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이 오히려 마을 사람들을 모두 예수께로 인도한 일을 말하고 있고, 딸의 병 고침을 바랐던 한 이방여인에게 예수는 ‘자식에게 줄 빵을 개들에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는 모욕적이고 매몰찬 거절에도 불구하고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답함으로 남성 예수를 멋지게 한방 먹이는 얘기를 전하면서 이 여인을 통해 굶주린 이방인 4천명을 먹이는 급식기적 이야기를 전함으로 이방 구원의 새로운 장을 여는 주역이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4개의 복음서는 동일하게 죽음의 자리에까지 스승과 함께 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남성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오직 여성들만이 십자가의 곁을 지켰고, 새벽의 미명을 뚫고 예수 무덤을 찾아 나섰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은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다시금 만날 것이다라는 얘기를 들은 여성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인해 놀랐다는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라고 하는 현장 곧 투쟁과 고난의 아픔을 피할 수 없는 그 현장에서 다시금 예수의 뒤를 따라 역사 변혁의 민중 운동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이를 기록한 마가가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가 그때 바로 전해지지 않았는냐?는 반문에 대한 임기응변적 답변으로 여성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의도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박영숙선생님을 비롯하여 이희호여사님이나 박용길장로님과 같은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볼 때,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남성들보다 더 두려움을 많이 탄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감성에 치우친 편견일 뿐, 실제 역사 변혁에 있어 남성들을 움직인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서 전체 맥락에서 보면 실제 역사에 있어서는 이 여성들이 두려워서 입을 닫았던 것이 아니라 남성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을 두려워한 남성제자들이 꺼려하여 이를 무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여성들이 먼저 갈릴리로 갔고 그들을 통해 예수 운동이 다시 시작했고, 여기에 뒤늦게 남성제자들이 어쩔 수 없이 동참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성들을 깍아 내리기 위한 시도를 끊임없이 하여 온 것입니다.

박영숙선생님과 같이 한 여성의 삶의 이야기가 언론의 전체 한 면을 차지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여성들의 삶을 남성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한 여성 신학자가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이렇게 얘기한 것을 기억합니다. 왜 여성들은 세계 역사를 논하고 정치를 논하고 우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는가? 왜 남성들에게 이런 영역들을 맡겨놓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전 이 자리에 참여한 여성들이 이제는 남성 지배의 역사 곧 폭력에 기초한 힘의 역사를 끝장내고, 사랑에 기초한 포용과 상생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제가 말하는 여성은 성적 관점이 아닌 젠더의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이라고 하지만, 어렸을 때 부모님이 겪은 폭력의 트로우마에 갇혀 있는 어떤 여성 지도자들은 권력을 잡게 되면 더 큰 폭력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가끔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박영숙선생님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 박영숙선생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을 기린다면 갈릴리로 가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는 억눌린 민중들이 살아가는 변두리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역사 변혁은 변두리로부터 일어나지 결코 중앙에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빈 무덤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입니다, 무덤의 비어있는 그 공간은 바로 우리들의 투쟁의 이야기로 채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삶에 지치고 소외된 사람들이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서는 희망과 연대의 이야기로 채워 나가야할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에 처음 부임하여 가진 교회 수련회에서 유언장쓰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박영숙선생님께서 매우 진지한 자세로 이를 쓰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이 드신 분들에게 유언장을 권고하면 대부분이 나중에 쓰겠다고 이를 미루십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유언장을 미리 쓰도록 매년 권고합니다만, 젊은 분들은 내시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거의 내지 않으십니다. 박영숙선생님은 작년에 이를 다시 고쳐 쓰셨고 이에 기초하여 장례절차를 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꼭 유언장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죽음학을 연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두 자녀가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릅니다. 동시에 참석자들이 미리 받은 봉투를 열자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죽음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번데기라는 육체의 탈을 벗고 영혼의 나비가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사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사망아!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죽음아! 네가 쏘는 가시가 어디 있느냐?’ 하며 죽음을 뚫고 일어서는 부활의 능력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향해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영숙선생은 평생의 신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최종의 순간까지 현역으로 사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의 삶을 본받아 모두 현역으로, 청년 자유인의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박영숙선생님께서 향린교회에 기증하신 유산은 앞으로 여성계 대표와 가족들이 참여하는 이사회를 조직하여 선생님의 뜻을 계속 이어갈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어지는 오늘의 장례 절차를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 함께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향린교회 목사 한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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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 도 사

 

 

사랑하는 박영숙 선생님! 저희들을 한결같이 따뜻하게 사랑해주셨던 박영숙 선생님!

선생님의 갑작스런 소천은 여성·환경단체들을 포함해 선생님을 직간접으로 알고 있는 시민사회의 많은 활동가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슬픔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암으로 투병 중이시라는 소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막상 선생님의 부음을 대하게 된 저희들은 마음 둘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선생님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늘 저녁의 이 시간이 더 안타깝게 느껴짐을 숨길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선생님을 모시고 참으로 행복하게 일했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1995년이었던가요? 리우회의가 끝나고 의제21이 한국사회에 회자되던 어느날, 선생님은 당시 환경시민단체의 중견실무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유정길, 민만기, 김제남, 여진구, 그리고 저였습니다. 서울시가 지방의제21을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였다는 말씀과 함께, 이렇게 몇사람이 모여 당시 명칭이 확정되지 않은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구성과, 이를 통해 서울특별시의 지방의제21을 만들 로드맵을 함께 그려가자고 제안하셨지요.

그 이후 우리 다섯사람은 1주일에 한번씩, 때로는 저희끼리, 때로는 선생님과 함께 녹색서울시민위원회의 규약을 만들고, 창립 위원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등, 지속가능한 발전을 구현하기 위한 최초의 민-관 거버넌스를 창출한다는 설레임으로 정말 열성을 다해 일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때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지만, 선생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저로서는 무척이나 행복했었지요. 당시 서울YMCA에서 환경담당 간사로 일하고 있던 저는, 거대단체의 관료적 장벽에 부딪혀 환경운동을 마음껏 펼쳐볼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터라,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확신과 열정을 지니신 선생님을 모시고 새로운 일감을 개척하는 것은 참으로 신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새로운 일이었던 만큼, 적지 않은 장벽들과 부딪혔습니다. 특히 당시 거버넌스에 대한 이해나 경험이 전무했던 서울특별시 공무원들의 경직된 태도와 권위의식, 오랫동안 고착된 갑-을관계 의식, 그리고 시민사회에 대한 몰이해로 사사건건 부딪침이 일어났습니다. 어느날, 평소에 늘 온화하고 따뜻하셨던 선생님은 서울시 공무원들에게 너무나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지요. 평소에 소통과 대화와 신뢰적 관계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지만, 원칙과 철학이 끝내 통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실 때 선생님의 ‘단호함’이 결기있게 드러나는 모습을 저희들은 놀람과 감동으로 바라보곤 했지요.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서로가 의미를 충족시키고 행복해지는 길을 일관되게 모색하는 분이셨지만, 동시에 옳다고 믿는 것을 우직하게 발언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1년여동안 녹색서울시민위원회를 만들고 또 제1기의 위원회를 함께 하면서, 여러가지 우여곡절과 어려움을 끝내 돌파하여 ‘서울의제21’이라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은 저희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경험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박영숙 선생님!

이제 떠나가시면 저희들은 선생님이 참으로 많이 그리울 겁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당신의 신앙과 운동의 실천을 통해 보여주신 그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참 아름다웠던 여성 지도자로서의 우뚝 서신 삶은 저희들의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던 선생님! 부디 저희들의 가슴 깊이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 계셔서, 선생님께서 염원하셨던 세계 -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뛰놀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도정에 한 치의 게으름이나 주저함 없이, 저희들이 한마음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사랑의 채찍으로 살아계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부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의 평화를 마음껏 누리시길 머리숙여 기도 드립니다.

 

 

 

남부원(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바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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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영숙 선생 추모사

 

 

박영숙 선생님.

영정 사진 속에서 여전히 환하게 웃고 계시는 선생님께 추모의 인사를 드리게 되니 어떤 말로 시작을 해야할지 가슴이 먹먹합니다. 몇 년 전, 선생님께 YWCA가 한국여성지도자상을 드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한국Y에서 받은 훈련이 선생님께 가장 큰 자산이셨다고, 그래서 Y를 위해 더 많이 기도하고 함께 해주시겠노라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게 되니 더 많은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나 큽니다.

언제 뵈어도 늘 밝고 열정적이고 활기차 보이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실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저희들은 더욱 슬프고 마음이 아픕니다.

선생님은 한국전쟁이 온 나라를 휩쓸고간 50년대 중반 이화여대에서 수학하시던 시절 YWCA를 만나셨고, 한국사회의 재건을 위해 Y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시고 졸업과 함께 Y 실무활동가로서의 삶을 택하셨습니다. 특별히 올바른 가치관과 비전을 가진 청년들을 키우고, 활동의 장을 열어주고 지원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으셨음을 저희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 이희호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한국YWCA연합회의 총무로 취임하신 선생님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고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셨습니다. 여성들의 문제에 Y가 적극 나서서 선구자적 여성단체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Y 활동의 핵심을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여성 지도력, 특별히 청년들의 리더십양성과 소외받는 이들의 인권회복에 두고, 항상 앞장서 행하셨습니다.

임기를 마치신 후에는 더 넓은 사회로 나가셔서 환경운동가로, 인권운동가로, 정치인으로 헌신하시면서 Y의 운동과 바른 역할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시고 지원해 주셨습니다.

 

48년 전 제가 처음 서울Y에서 실무활동가로 일할 때 연합회의 총무로 처음뵈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고 소신있고 덕있는 여성운동가의 모습이 정말 인상깊었습니다. Y 밖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대열에서 탄압받은 운동가의 가족으로 선생님과 다시 만났습니다. 저의 남편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을 때, 어려운 상황에 있던 구속자가족들을 고 안병무 박사님과 함께 돌보시면서 용기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따뜻하고 깊은 사랑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정치인으로서도, 운동가로서도, 투쟁을 앞세우기보다는 따뜻한 밥을 우선 챙겨 먹이시는 살림꾼이셨습니다.

 

 

선생님.

참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올곧게 행하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세상이라는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사셨고, 교회를 통해, 단체들을 통해, 마지막 순간까지 참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선생님은 참으로 복된 신앙인이셨습니다.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에 가신 선생님,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선생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아름답게 생을 마무리하도록 지켜 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소망하셨던 정의와 평화, 생명살림의 하나님나라를 위해 남아있는 후배들이 힘을 모아 더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어주신 끈을 놓치지 않고 이어갈 것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환한 미소로 늘 저희와 함께 하셨던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국YWCA연합회 부회장 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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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 시대 가장 위대하셨던 현장 운동가, 큰 스승 박영숙 선생님!

선생님은 사회 약자들을 위한 일, 진정한 사회발전을 위한 일이면 여성, 환경, 인권, 민주화, 노동 등 어떤 영역의 일이든 ‘내일이다’ 생각하며 최선을 다 하셨던 분입니다.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든 생명들을 사랑하셔서 품으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며 불태우셨던 분이였기에, 선생님 곁은 항상 따스했고 감동의 전율이 느껴졌나 봅니다.

 

제 삶에서 가장 큰 축복은 그분을 만난 것이고 곁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세 가지로 기억합니다.

(1) 진정성 있는 지도자: 행사장, 회의 일찍오셔서 끝까지계시고 열심히 참여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 BMW 등 환경실천 철저히)

(2) 따듯하면서도 엄격한 운동가: 연말이면 활동가들 집으로 초대해 손수 지으신 밥 챙겨 먹이시던 분. 신입활동가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셨고 후배 활동가들을 참 사랑하셨던 분입니다. (촛불집회,사대강 집회 등에서 뵈면 활동가들 식사는 하였나? 옷들은 단단히 입었나? 옷이 얇다...)

(3) 큰 스승이셨으며 동시에 겸손한 학습자: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신 매우 겸손하신 분.- 차 드릴까 여쭈면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날 챙기느냐’시며 물 한잔도 본인이 직접 갖다 드셨고,

병문안 가면, 왜 왔냐 시간 아껴서 일해야지. 작은 것이라도 사서 가면, 날 위해 돈 쓰지마라 대표로서 돈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하셨죠 (어려운 곳에 돈 쓰라)

끊임없이 학습하며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활동들을 만들고 이끄셨던 분입니다.‘즐겁게 활동하자,전체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운동판 짜자!’ 최근 병상에서, 누군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열심히 하실 수 있었냐고..“일을 맡을 때 마다 첫 연인을 만나 데이트하듯 두근거리는 마음과 각오로 최선을 다하셨다”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보내드리면서 선생님의 큰 사랑이 담긴 환한 웃음을 우리 모두 오래도록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자주 하셨던 말씀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올바르게 최선을 다하는 저희들 되겠습니다. 곁에 계셔서 참 행복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성환경연대 50대 으뜸지기 남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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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박영숙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추모사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고(故)박영숙 선생님은 이 꿈을 좇아,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일, 이 땅의 여성들이 요구하는 역할에 평생 열정을 바치시고, 5월 17일 새벽 영면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평양에서 출생하시어 떠나신 날까지 정의와 평등, 인권과 환경, 그리고 여성과 생명의 편에서 의로운 리더로 사셨습니다. 1955년 YWCA에서 처음 사회참여를 시작한 선생님은 한반도의 역사적 격변기 반세기동안 환경단체와 여성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를 설립하셨고, 세상을 떠나시던 날까지도 한국여성재단 고문, 여성환경연대 으뜸지기, 미래포럼 이사장, 살림이재단 이사장, 여성평화외교포럼 이사장, 살림정치여성행동 공동대표, 아시아 위민브릿지 두런두런 이사장으로 일하시던 현역 활동가이셨습니다.

 

싸울 때는 치열하게 싸우시고, 온 세상을 보듬을 만큼 넓은 품으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안아주시며, 변화에 앞장서는 후배 리더들을 위해서는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던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내가 뭘 하면 좋을까?’라시며 해결책을 함께 찾으시고, 평생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시며 생명사랑과 환경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선생님은 실천하는 지성의 대표이자 큰 언니셨습니다. 늘 미소와 기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후배를 이끄시던 선생님은 부드러운 권위와 카리스마의 상징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선생님이 며칠동안 밤까지 새워가며 손수 장만하여 주신 푸짐하고 맛깔난 음식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2010년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목토시 수백 개를 뜨셨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북한에 보내지 못하게 되자 몹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크신 어른 한 분을 잃었습니다. 남녀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사회, 지속가능한 지구환경, 민주화를 너머 평화와 통일을 만드는 일 등,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많은 과제들은 오롯이 여기 남은 이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들 가슴에, 그리고 이 땅의 딸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살아계실 선생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조형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Posted by 한국여성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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