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계여성의 날’기념행사 준비로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분주하다. 활동가들의 야근불빛과 이어지는 자원봉사자들과 방문객의 발걸음에 뜰도 따라 분주하다.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계절을 탐색하던 상사화 새싹이 친구들을 불러내자 튤립도 따라 나왔다.

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준비하며 봄을 느끼기에는 이른 추위에 올해는 새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상사화 새싹을 만나지 못 할 줄 알았는데 새삼 입춘절기의 정확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길고, 춥고, 무겁던 겨울의 끝자락과 봄이 만나는 3월 8일은 세계여성의 날이다.

 

 38세계여성의 날의 기원

1908년 미국에서 여성의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행진이 시작 되었고, 이를 계기로 정당에 소속된 여성들이 1909년 2월 마지막 일요일에 여성선거권 획득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여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코펜하겐에서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국제여성의 날’에 관한 결의가 채택되고, 확대되어 나가면서 1922년부터 매년 3월8일에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하는 관행이 국제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성인권보호와 성평등 가치의 중요성을 주요한 국제사회가치로 존중하고 지켜나가기 위해 유엔은 1975년 3월8일을 ‘국제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이후 매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유엔사무총장의 기념축사를 통해 여성인권에 관한 유엔차원의 결의를 전 세계에 선포하고 있다.

1908년 3월8일 미국여성들의 행진을 기원으로부터 세계 각국과 유엔에서 진행하고 있는 ‘38세계여성의 날’을 중국 등 몇 개의 나라에서는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여성들에게 꽃을 선물하며 전 국민적 축제로 만들고 있기도 하다.

 

 한국여성대회

한국에서는 1920년 중반부터 열렸으나 일제의 탄압 속에서 명맥이 유지되지 못해 간헐적으로 진행되어오다 1948년 이후 사회적 격변 속에서 맥이 끊겼다. 이후 1985년 전국14개 여성단체들의 ‘제1회 여성대회’를 시작으로 1987년 한국여성단체 연합이 창립된 후 지금까지 한국여성단체연합 주관으로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는 한국여성운동의 성과를 공유하고 대중적으로 확산하며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목소리 담아내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며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문화축제로 성장해 왔다.

 

 

 2010년 38세계여성의 날 기념행사 ‘여성의 한표로, 희망을 현실로’

올해로 26회를 맞는 ‘한국여성대회’를 앞두고, 100년 전 여성들이 외쳤던 생존권과 인권 그리고 성평등 문제를 다름없이 오늘, 우리의 차가운 현실로 만나고 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 경제위기속에서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가는데 가장 먼저 해고되는 노동자는 여성이며, 모든 연령의 여성들이 취업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또한, 가정 내에서 육아나 가사노동의 1차 책임자 역시 여성이다. 함께 벌어야만 하는 어려운 살림살이에 맞벌이 가족이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 속에서 여성은 일과 가족생활을 모두 잘 해야 하는 슈퍼우먼이 되기를 요구받고 있다. 남성들은 과로사의 위협을 느끼며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조건을 감내하면서 가족과 함께 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다.

 

자유와 해방 그리고 귀하고 존엄함을 상징하는 보라색은 여성운동의 상징색이다. 매년 3월8일을 즈음하여 보라색과 함께 열리는 한국여성대회가 올해는 오는 3월6일 오후 1시부터 이화여대 대강당과 주변 거리에서 지방선거가 있는 해인만큼 ‘여성의 참여로, 희망을 현실로를 슬로건으로 다채롭게 진행 된다.

친구, 가족, 동료들과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축제에 함께 참여하여 긴 겨울의 옷을 벗고 존엄한 자신을 확인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희망을 현실로 만들 약속을 하자. 그리고 오는 6월2일 지방선거에 투표할 것과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볼 것을 첫 약속으로 만들어 보자.

추위 속에 봄이 있음을 알고 먼저 나온 상사화새싹의 용기가 봄을 불러오듯 ‘38세계여성의날’ 기념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1908년 여성들이 외쳤던 요구를 2010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쳐야 하는 슬픈 현실을 바꿔내자.

여성과 남성이 모두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함께 아이를 양육하고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는 사회, 빈곤과 폭력 없는 안전한 세상, 여성과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평등한 공동체는 이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김금옥(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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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나? 엄마는 종종 나에게 흰머리를 뽑아 달라고 했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걸 왜 뽑으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나오는대로 검은 머리 사이에 그냥 있어도 안 흉한데 말이다.

작년이었다. 흰머리 좀 뽑아달라는 내 부탁에 아이는 재미있는 놀이라 생각했는지 흔쾌히 승낙했다. 처음엔 검은 머리를 너무 많이 뽑아서, 나중엔 재미없어서 아이는 금방 그만두었다.

흰머리를 그냥 두면 보기 싫다는 사십대의 내 엄마와 서글플 정도로 생각의 일치를 보는 나. 나이를 먹어 가면 이렇게 생각이 바뀌는 걸까?

과거에서 현재로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는 생각의 여정들을 따라가며 잠시잠시 머물게 되는 지점들, 바로 생각의 경계다. 그 경계를 넘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이 먹는 게 꼭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또 하나의 경계에 선다.

 

결혼, ‘안할 수도’에서 ‘소중한 일상의 일부’로

코오롱아파트가 끝나고 사천고가가 보이는 한적한 이차선 도로변, 쓸쓸해 보이는 어느 건물. 이곳에는 화가의 작업실들이 있다. 동네와 나름 어울린다.

올해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화가 김수영(38)씨는 십여 년 전만 해도 결혼하면 경제는 남편이 책임지고 아이를 낳고 살아야하고 자신도 그런 ‘일반적’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일반적 결혼 생활도 자신의 능력 밖에 있음을 삼십대를 통과하며 깨달았다. 더불어 결혼에 대한 생각도 차츰 바뀌었다.

“결혼해도 일반적으로 안 살아도 되고 자식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죠. 외국이라면 동거를 해도 되겠지만 한국에서는 동거한다면 남자보다 여자가 더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잖아요. 그럼 너무 불편할 거 같았어요. 이런 일에 그렇게 에너지 소모하며 살 필요가 있나 싶었죠.”

그러나 내일 모레 마흔을 앞둔 지금의 생각은 또 다르다. 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든다. 왜 사람들이 모두 일반적인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지 이해하는 수준에 와 있다. 아이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제는 일상, 삶을 느끼며 살기, 남편, 행복, 좋아하는 대로 작업하기, 이런 생각들이 그에게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다. 경계를 넘어가는 중이다.

 

여자, ’화장한 외모’에서 ‘하는 짓이 예쁜’으로

경성고 사거리 근처에 있는 디자인업체의 수장이자 4인 가족의 가장인 박희동(45)씨는 나이를 먹어가며 좋아하는 여자의상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화장한 걸(girl)들에게 눈길이 갔는데 이젠 곱게 늙어 가는 여자가 좋아요. ’척’하지 않는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음에 와 닿아요. 또한 외모 보다는 하는 짓이 예쁜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껴요."

40대 아저씨다운 솔직한 멘트다. 그는 하루하루 사는 게 무척 재미있다. 어디서 일확천금이 생겨 놀고 먹고 살면 재미없을 거 같다. 젊었을 때는 빨리 돈 벌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알맞은 긴장, 스트레스, 아이의 짜증, 이런 게 있어서, 출근할 데가 있고 일이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 될 때가 있어서 좋다.

과거에는 돈, 마누라, 집이 기본적으로 소유해야 할 목록이라 생각했던 그는 이제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삶의 지혜, 참다운 삶, 행복을 지향하는 가치로 삼고 있다.

 

관심사, ’내 가족 우선’에서 ‘시민으로서의 책임’으로

경성고 벽돌담을 따라 황금색 은행나무 잎들이 뒹구는 길을 건너면 <패밀리마트>가 있다. 높은 건물 없고 평범해서 안정감을 주는 그 골목을 걷다보면 작은 사거리 모퉁이에 이름이 특이한 호프집이 있다. <어쭈구리> 사장님 이윤주(56)씨는 연남동 14통 통장이다.

“작은 애가 네 살 때 ‘새마을 부녀회’에 들어갔지. 그 일을 하다가 통장직을 맡게 되었어. 그때가 40대였어. 봉사가 뭔지 동네 인구가 얼마인지, 마포구에 동이 몇 개나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는 통장을 하면서 지역, 도시, 나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라라니, 애국심인가? 그는 시민정신을 말한다.

“나라에 바라는 건 너무 많고 시민으로서의 작은 일들을 소홀히 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해. 법보다 무서운 게 도덕이고 양심이지.”

한장에 얼마 되지 않는 쓰레기봉투 아까워 검은 봉지에 음식물 버리면서 커피값은 자기가 내겠다고 큰소리치는 주부, 목욕탕 가서 물을 ‘물’쓰듯 하는 사람, 승용차로 아이들 통학시켜주는 부모, 부부간의 주도권이 어느 한쪽의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왔다갔다하는 세태에 대해서까지 그는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성향, ‘성과주의 리더’에서 ‘따뜻한 여행작가’로

“책을 쓰는 일이 예전엔 나와 먼 얘기인 줄 알았어요. 이젠 나에게도 가까운 일이구나 생각해요. 책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의 내면을 이제는 이해해요. 나도 그런 욕구 느끼거든요. 나를 표현해내는 도구로요.”

보석감정사인 김영애(43)씨가 쓰고 싶은 건 어떤 책일까?

아버지 영향으로 일등에 대한 강박을 갖고 살았던 그는 간호사 시절에도 긴박한 상황에 적응해야하는 응급실 근무를 좋아했다. 단기 집중과 성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흔 즈음 자신이 추구하는 삶이‘참 얕다’는 자각을 처음하게 되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이었나 고민하게 되었고 그가 내린 답은 여행이었다.

동남아시아와 미국 등을 여행하며 풍요로워지고 넓고 깊어지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 특정지역에 대한 여행책, 공정여행에 관한 책, 관광이나 유적지 소개 이상의, 사람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론리 플래닛을 뛰어넘는 그런 여행책을 쓰고 싶다.

글 김혜련 사진 최형원

[김혜련님은 매일 조금씩 글을 쓰며 소설습작 중이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공부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를 불어로 번역했다.]

 

본 글은 아줌마들이 만드는 지역잡지 동네한바퀴 더(발행 줌마네/창간호 2009년 겨울 연남동)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09년 한국여성재단 자유공모사업 '지역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아줌마 전문기자단 양성과 소통매체 개발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개발된 지역매체(제작비 일부 지원)로써, '줌마네'가 근거하고 있는 마포지역을 시범지역으로 주민들을 위한 욕구파악과 그에 맞는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개인화된 구성원들의 소통화 네트워킹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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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캄보디아 이름은 떼위. 그러고 보니 내가 떼위란 이름으로 지낸지도 어언 1년하고도 반년이나 지나가버렸다. 
“왜 하필 캄보디아야?” 
캄보디아로 오기 전, 갑작스런 캄보디아행 선포에 눈을 치켜뜨고 침 튀기며 “아니, 왜?”를 연발하던 반응들이 그다지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국내에도 도울 사람들 천지인데 왜 굳이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냐는 흔해 빠진 질문. 그럼에도 그 흔해 빠진 질문에 명쾌하고 호탕하게 대답을 내던진 적이 있던가. 그런 반응들 앞에서 나또한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을 흔해빠진 대답을 할 뿐이었다. 
“내가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야!” 

그렇게 떠나온 곳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캄보디아가 낯설고 어설픈 이방인에게 한국 NGO에서 운영하는 문화복지센터를 총괄하는 큰 업무가 주어졌다. 이 센터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대략 현지인 대상 한국어교실 운영, 지역 주민 대상 도서관 및 아동을 위한 이동도서관 운영, 한국 학생들의 장단기봉사프로그램 진행, 현지 NGO 발굴 및 지원 등등. 
마음만 준비해왔지 실력도 경력도 부실하기 짝이 없는 내가 과연 이것들을 잘해낼 수 있을까? 큰 일이 주어졌다는 부담감이 땀은 물론 혼까지 쏙 빼버리는 캄보디아의 더위와 함께 뒤엉켜 처음 얼마간은 밤잠설치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적응력 하나만은 능한 몸! 우선 스스로를 현지화시키자’는 각오로 현지어, 현지음식, 현지사람들에 다가가며 캄보디아 속으로 슬금슬금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백한다. 캄보디아 생활은 ‘인내’, 즉 ‘참기’ 퍼레이드였다는 것을.

1년이 한여름인 살인더위 참기, 수많은 오토바이가 뿡뿡 방출하는 시꺼먼 매연 참기, 365일내내 물어뜯는 모기떼 공격 참기, 길거리 음식 속 심심찮게 헤엄치고 있는 개미떼 참기, 여유롭다 못해 매사 느릿느릿한 현지인들의 생활패턴 참기,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비싸게 가격매기는 장사꾼들 상대로 화 참기, 검게 그을어지는 피부와 두꺼비등짝처럼 거칠어지는 손발 앞에 슬픔 참기….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현장 활동가의 사명인 ‘현지인의,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을 위한’ 일을 제대로 해야 할 텐데. 지금 이 프로그램은 과연 이들을 진정 위한 일일까. 외국인 주제에 현지 물정도 모른 채 “내 말이 맞아!”라며 윽박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들은 1년 내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괴롭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센터를 방문한 캄보디아 청년들이 자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101가지 아이디어를 모아 토론하는 모습, 책을 좀체 접하기 어려운 시골 아이들이 이동도서관에서 침 묻혀가며 신나게 책을 읽는 모습, 현지 NGO들이 동네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업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내가 하고 있는 활동 이상의 멋진 대가를 받고 있음에 감사했다. 

캄보디아 문화복지센터 책임자로서 1년간의 활동계약이 끝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캄보디아에 남아있다. 내 발목을 잡아끈 것은 다름 아닌 캄보디아 시골의 한 고아원 아이들. 센터 운영 당시 파트너기관이었던 NGO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아이들로, 처음 이 아이들을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처음 본 낯선 이에게 아이들은 푸른 하늘이 담긴 눈동자를 반짝이며 싱싱한 미소를 귀까지 걸고 달려와 이 넓고 푹신한 품에 폭 안겼다.

 

 

그 후로 틈만 나면 고아원을 찾았다. 부모가 없기에 정에 굶주렸을 테고 가난하기에 배 곪은 날이 더 많았을 텐데 참 이상한 아이들이다. 이 시골 아이들은 사랑은 받는 것보다 베풀어야한다고 생각하고 내 배가 아무리 고파도 맛난 것이 생기면 옆 사람이 세 명이건 열 명이건 아낌없이 나누고 있는 바보들이다. 믿겠는가?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사랑을 나누고, 가진 것 없어도 부자인양 무엇이든 베풀며 살고 있는 아이들이 캄보디아에서 살고 있다. 사랑은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주는 만큼 받아야한다고 믿던 부끄러운 어른에게 아이들이 말없이 알려준다. 그냥 주고 싶어요, 그래야 내가 행복하니까요라고. 

미소가 유난히 예쁜 그 아이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게 하고 싶어 캄보디아에 기약없이 남기로 했다. 

현재 나는 현지의 열악한 의료시설에 힘이 되고자 하는 한국 한의사들을 도와 한방의료봉사를 하고 현지에 한의원을 정착시키는 일을 하면서 주말이면 아이들과 풀밭 위를 뒹굴러 고아원으로 달려간다. 나를 가족이라 여기게 된 이 아이들에게 책임감있는 가족원으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한국에도 도와줄 사람이 많은데 왜 외국까지 나가서 돕는 일을 하느냐고 하던 이들에게 이제는 편안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이건 캄보디아건 그 어느 나라건 그 어디에나 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같은 꿈을 꾸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눔이란 너와 내가 같은 꿈, 같은 희망을 갖고 있음을 느끼고 움직이는 ‘희망의 걸음마’가 아닐까.

* 캄보디아 천사들의 모습을 좀더 보고 싶으시다면 여기를 클릭!
  http://www.cyworld.com/margie


                     장미애(자원활동가, 전 한국여성재단 기획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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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란 세상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또한 그 나눔이란 여유로움에서 떼어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아주 작은 것을 나누고 보여주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겐 커다란 힘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이 나눔의 미학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재능 나눔’에 대해 참여의사를 물어왔을 때, 망설임 없이 참여하기로 결정을 했다. 
우선은 다문화가정을 위하는 일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고, 더더구나 그분들의 집에 온전한 가족사진 한 장이 없다는 말에 더욱 그랬다. 순수하게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남모르게 봉사하시는 분들처럼 많은 날들을 봉사로 지내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지도 않은 나로선 봉사라면 몸을 이용한 것이거나 아니면 오로지 ‘사진’이라는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을 통해서가 전부이기에 촬영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가진 것 별로 없는 나에게도 남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이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사진인화전문 인터넷사이트에 전화를 걸었다. 기왕에 주려면 모든 마음을 다해 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진인화와 액자까지 협찬을 받고서야 안심이 되었고 마무리를 지은 기분이었다. 혼자서 그 많은 가정을 촬영하기엔 장비문제나 시간의 배분문제 등으로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내가 사진 강의를 하고 있는 한겨레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게도 많은 수의 수강생들이 기쁘게 달려와 주었고 자신의 장비와 시간을 기꺼이 촬영을 위해 내어주었다. 촬영을 하는 동안 그들의 얼굴이나 눈에선 즐거움과 새로움에 빛나고 있었고 촬영을 위해 자신의 얼굴과 몸을 내어주는 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이야기를 통해서 ‘소통’을 하는 모습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인물사진을 주로 촬영하는 나로선 사람들과의 소통이 아주 중요하다. 그 사람들을 보고 느끼면서 함께 얘기하는 것이 인물사진의 묘미다. 다문화가정의 가족들이 촬영을 위해 함께 카메라를 향하고 있을 때 나는 또 알게 되었다.우리는 모두 같다고. 이러한 봉사나 나눔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참여의 횟수가 적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수강생들과 사진을 고르면서 서로가 느끼고 보았던 느낌을 말하면서 모두는 한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눈다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진심으로 상대를 배려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작은 손재주를 크게 여겨주시고 높게 평가해주신 재단여러분과 다문화가정의 식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고 기꺼이 달려와 준 수강생에게도 감사드린다. 다음에도 이러한 작은 손재주라도 필요하다고 불러준다면 언제든 뛰어나갈 생각이다. 
감사의 시간이었다.

                        손홍주(씨네21 사진부장, 경성대 사진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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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신선한 노동의 대가에서 ‘10%를 삭감한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주급으로 받던 원고료를 두 달간이나 못 받은 터여서 여기저기서 생활비를 돌려대고 있을 때였다. 

‘그래, 이런 상황에 어찌됐든 돈이 나온다니 그나마 다행이지.’ 
이렇게 자위를 하며 나처럼 급여의 90%도 받지 못하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원고료의 삭감이유가 적자 경영에 따른 ‘고통분담’ 차원이라니, 같은 일터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일 아닌가..! 

고통분담! 
참 아름다운 말이다. 어려운 시기에 고통을 분담한다니, 그거야말로 ‘큰 나눔’이 아닐까.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과 고통은 나눌수록 적어진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이라면 당연히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건 인간적인 의무이며 책임이고 상식이니까. 

그러나 ‘고통분담’을 운운했던 그들은 상식의 뒷통수를 가멸차게 갈겨댔다. 
정직원들의 급여는 단 1%도 삭감되지 않았고, 나 같은 프리랜서들의 경우에만 10%에서 25%까지 대폭 삭감조치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미안함을 표시하지 않았고, 실업자 350만 시대에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식이었다. 근로자이면서도 노조를 결성하기 어려운 프리랜서들의 약점을 십분 이용했던 것이다. 

고통분담! 
그 말 때문에 나는 원고료가 지급되지 않는 순간에도 정기 기부를 멈출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엔 힘없고 약한 자들이 더 고통스러운 게 사실이니까. 액수는 적어도 그저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너나없이 어려운 이 시기에 ‘나눔’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환숙(방송작가 KBS라디오작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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