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은, 내가 받은 것을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당연한 실천. 
선한 부자 되어 아프리카에 물파이프 놓아주러 가는 것이 꿈

 

 


쌀쌀한 오후, 홍대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외모, 화려한 미소가 단연 눈에 들어온다. 방송을 하는 분이라 그런가? 10년차 홈쇼핑 쇼호스트 경력에 걸맞게 말솜씨(?)도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인터뷰 내내 그녀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눔과 기부에 대한 거침없는 열정과 큰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와 너를 넘어, 우리가 함께하는 세상을 생각하는 열혈 기부자. 장은영씨를 만나보자. 

"인터뷰 한다니까 처음에 너무 창피했어요. 저보다 더 많이 크게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죠.."
만나자 마자 손사래를 치며 멋쩍어 하던 그녀. 그러나 그녀의 삶에서 기부와 나눔의 영역은 결코 사소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다른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어요. 저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돌보는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녀는 2006년부터 한국여성재단에 매월 일정금액을 정기적으로 기부 하고 있다. 당시 CJ홈쇼핑에서 진행했던 특별모금방송을 본 것을 계기로 시작한 것이 벌써 4년째다.

사실 그녀는 아이를 낳기 이전에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무심하지 못했다. 모금 방송을 보다가 ARS를 누르는 것은 당연했고, 거리에 쓰러져 있는 노숙자 아저씨의 손에 만 원짜리를 쥐어주기도 하고, 지하철 걸인들의 바구니에 꼭 돈을 넣어주는 나눔의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그녀였다.

 


"단체에 기부를 처음 시작한 것은 굿네이버스에 성폭력당한 아이들을 위한 정기기부였어요. 그 이후 여성을 돕는 한국여성재단 기부를 시작했고 매달 조금씩 기부하는 곳들이 몇 군데 있어요. 세이브더칠드런(해외 아이들에게 물품 보내는 것), 월드비전(도시락으로 독거노인을 돕는 것), 홀트아동복지(장애인들의 재활에 필요한 약과 기계를 보조하는 것), 밀알재단(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수술비를 지원하는 것) 그리고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 사업의 수익과 함께 아마존의 자연을 보존하기 위해 기부하는 것까지예요."

총 7개. 모두 조금씩이라지만 말이 쉽지 어디 실천이 쉬운가? 그녀에게 나눔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고, 기꺼이 손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때로는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죠. 지금 내가 잘되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대상이 바뀔지라도 내가 받은 그 도움을 누군가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그녀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남편과 아들에게도 전해졌다. 처음에는 '우리 먼저 잘살면 안 될까?' 하던 남편(일러스트 작가)은 이제 그림으로 활발한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고, 아직 내 것이 먼저인 초등학생 아들도 때로는 '저금통을 아프리카에 보내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그녀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씨앗 뿌리듯 기부처가 늘어가고 있는데, 혹시라도 살림살이에 따라 기부를 줄이게 되는 일이 없도록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한다. 그녀가 뿌리고 있는 나눔의 씨앗은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까?


"기부를 더 많이 하는 선한 부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저의 최종 꿈은 아프리카에 물파이프를 놓아주러 가는 것입니다. 물과 공기는 신이 주신 선물인데, 그것도 마음껏 누리지 못해 고통 받는 아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돈 많이 벌어야겠죠?(웃음)"

큰 꿈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꿈이다. 사람은 꿈대로 산다고 했던가? 꿈만큼이나 크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언제고 방송에서 보게 된다면, 더 없이 반가울 것 같다. 

- 한국여성재단 W.C기자단 강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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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기부자 박소영씨 
엄마를 위한 딸의 생일 선물,

 

이제 막 대학생활 1년을 보낸 20살의 그녀. 
미래의 디자이너를 꿈꾸며 캔버스에 푸른 꿈을 그려가는 미술학도
지난해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엄마를 행복하게 기억하고 싶은 예쁜 딸
이 땅의 더 많은 엄마들을 위해 실천하는 아름다운 기부자
이번 기부자 인터뷰의 주인공, 박소영씨입니다.

 

한국여성재단에 수많은 기부자들이 있지만, 한국여성재단의 홈페이지에 남겨진 한 기부자의 사연은 특히 남달랐다.

"지난해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돌아가셨어요. 올해 첫 생일을 맞았는데, 어머니의 생일 선물을 대신하여 여성재단에 기부를 하려고 합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듣고 싶어졌다. (대구에 거주하는 관계로 인터뷰는 전화로 진행되었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나즈막히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터뷰 요청을 받고 좀 놀랐지만, 좋은 이야기를 알리는 거라는 생각에 인터뷰에 응했다는 그녀. 구수하고 귀여운 대구 사투리 덕분에 금방 친근함이 느껴졌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첫 생일이 되었는데, 아무것도 안하기에는 마음이 많이 허전했어요. 무덤에 꽃을 놓는 것은 잠시면 시들어 버릴 것이고, 살아계실 때 드리고 싶었던 선물은 이제 받으실 수가 없으니, 무엇을 할까?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기부'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떻게 이런 야무지고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그녀에게 기부와 나눔은 익숙한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불우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매달 조금씩의 돈을 기부하는 정도였지만, 최근 사회적으로 기부와 나눔에 대한 홍보가 많이 활발해 지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어도 기분이 좋은데, 더 좋은 곳에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단다.

다양한 기부처가 있지만 이왕이면 엄마와 같은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단체가 좋겠다는 생각에 마땅한 기부처를 찾다가 '한국여성재단'을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이런 단체가 있는지도...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 여성의 삶이 아닌 그저 어머니와 아내의 삶으로 지친 저희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좀 더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는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는 올해 엄마의 생일날 첫 기부를 하고 나서 며칠 동안이나 참 기분이 좋았단다.
"엄마에 대해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제가 기부한 작은 금액이 보태어 져서 엄마와 같은 분들을 위해 잘 쓰여질 것이라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고요." 

아직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20살의 그녀. 인터뷰 중간 중간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울먹이는 듯 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러나 이제 매년 엄마의 생일은 이 땅의 더 많은 엄마들을 위해 그녀가 귀한 선물을 하는 날이 될 것이다. 
더해가는 기부금만큼, 엄마에 대한 그녀의 기억이 기쁨으로 채워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 한국여성재단 W.C 기자단 강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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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나눔 서포터즈에서 정기기부자로  
  한국여성재단과 아름다운 인연 이어가는 김세희씨  

기부란,

남을 돕겠단 마음을 그저 일상 속에서 한 걸음 옮기는 것!

  

 

"예전부터 누군가를 돕고 싶단 생각이 있었는데 취업을 하면서 정기기부를 하게 됐죠. 
기왕이면 문화나눔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공연도 보고 봉사도 하며 작은 사랑의 실천을 배웠던 여성재단을 통해 기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점심시간,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여의도 빌딩숲에서 오늘 인터뷰 주인공 김세희씨(24)를 만났다. 올해 초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그녀는 또렷한 말투에 사회초년병답게 반짝거리는 눈빛이었다.
세희씨는 워낙 공연관람을 좋아해서 평소 여러 포털 사이트나 카페 등을 통해 공연관련 소식들을 주의 깊게 보는 편이었단다. 그러다 우연히 한국여성재단에서 문화나눔 서포터즈를 뽑는다는 공지를 보게 됐다고. 당시엔 학생이었는데 ‘그늘진 이웃을 위해 애쓰는 공익활동가들과 문화나눔의 경험이 없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공연관람티켓을 제공’한다는 재단의 문화나눔 사업이 그녀에게 의미 깊게 다가왔다. 
세희씨는 6개월간 문화나눔 서포터즈로 활동하게 되었고 활동 기간 동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며 소중한 경험을 갖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주변에서 다른 분들이 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명한 단체들도 많이 접했어요. 전 기왕이면 제가 문화나눔 서포터즈로 활동 했었던 한국여성재단에 기부를 결심하게 된거죠.” 
그렇게 세희씨는 한국여성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정기기부를 시작하게 됐다. 기부를 시작한 지는 아직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기부’라고 하면 왠지 거창하게만 느껴져 망설이는 사람에게 그녀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 이 만 원을 아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시작 하라고 말한다.
“저 역시 입사한 지 얼마 안돼서 시간적 여유가 많진 않지만 앞으로 봉사도 하고 싶고 정기기부도 꾸준히 할 생각 이예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 금액도 조금씩 늘려가고 싶고요.” 

 

문화나눔 서포터즈로 이어진 한국여성재단과 인연의 끈을 ‘기부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이어가고 있는 김세희씨. 기부에 대한 마음을 결심에 그치지 않고 취업과 동시에 실천에 옮긴 세희씨를 보며 ‘기부’란 남을 돕겠단 마음을 그저 일상 속에서 한 걸음 옮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단 생각이 든다.

 

- W.C기자단 김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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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생활이 된 한국여성재단 정기기부자 송현직, 이은미씨 부부

내 것을 조금 줄이면

훨씬 더 큰 것을 나눌 수 있어요

 

구름이 두텁게 해를 가리고 내려 앉아 있어 낮 두시의 거리가 어둑신하다. 여름이 지나고 기온이 급하게 내려가는 통에 거리에는 제법 두꺼운 옷들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쌀랑한 날씨 탓인지 자그만 까페 한 구석을 자리한 노란 스탠드 불빛이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진다. 테이블 앞으로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해사한 얼굴의 젊은이가 다가선다. 


“안녕하세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쑥스러운 듯 인사를 하며 다가서는 그의 이름은 송현직(33). 개구쟁이 꼬마 같이 장난스런 미소를 가진 그는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여성재단의 정기기부자이다.  

그가 처음 한국여성재단을 접한 것은 2007년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티비를 보다가 모금방송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소개된 모녀의 딱한 사연을 보고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움을 주고 싶어 한국여성재단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일 년 간 한국여성재단의 정기기부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기부가 잠시 중단되었다.

“반찬 세 개 먹을 것 두 개로 줄이고, 30평 살 것 20평으로 줄이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잖아요.”
내 몫을 다투는 세상에서 내 것을 줄이거나 희생하면서 타인과 나누려고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생각이다. 그에게 이런 삶을 실천하게 만드는 데에는 신앙의 힘이 크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같은 성당에서 만난 아내 이은미씨와 작년에 화촉을 밝혔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데에 뜻을 함께했다.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제안하여 다시 한국여성재단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가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꼭 도와야 한다는 게 제 아내의 지론입니다. 엄마가 흔들리면 가정이 힘들어지니까요.”
그런 아내와 함께 그는 특별히 빈곤한 여성,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들의 복지를 위해 한국여성재단이 힘써 주길 바란다. 그의 말대로 어머니가 살아야 가정이 살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재단이 투명하게 열심히 뛰면서 일할 것을 믿어요. 주변에는 쪽방촌 같은 곳에 직접 기부를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저는 좀 더 큰일을 하는데 보탬이 되고 싶어서 한국여성재단을 택했습니다.”

조금은 잘난 척한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데 시종일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느냐며 민망해하는 그를 보며, 작은 성취에도 이내 자랑삼고 거만해지는 우리자신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진다. 그의 말처럼 좋은 것들은 늘 ‘나누면 커진다’. 같이 나눈 따뜻한 마음으로 인해 잠시 쌀쌀한 날씨도 잊어버린 봄날 같은 훈훈함이 가득한 자리였다.

 

- 한국여성재단 W.C기자단 박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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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기뻐서 나는 눈물이 아닌, 딸을 낳아서 어쩌냐는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내가 세상에 나오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단다. 눈이 작고 전체적으로 외모가 영 떨어지는 아이였음에도, 단지 그놈의 고추를 달고 있다는 게 그분들에게 그리도 큰 기쁨을 준 거였다.

 

살아오는 내내 어머니는 나만 편애하셨다. 난 편애에서 비롯된 각종 혜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렇게 ‘남자’로 자랐다. 그런 나를 깨우쳐 준 분이 강준만 교수님이였다. 지역차별을 비롯해 모든 차별에 대한 항의를 날렸던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읽으면서 난 내가 당연하게 누렸던 삶이 오히려 미안해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됐다. 그 후부터 짬짬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가해지고 있는지를 알았고, 그런 차별에 최소한 분노는 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2년 전, 여성희망캠페인 100인 기부릴레이의 이끔이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여성을 위한 일에 기여할 기회를 얻어서기도 하고, 십여 년의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이 일만큼은 자신있게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잘 사는 세상을 원하지 않습니까?”

내 또래 쯤 되는 여성이라면 굳이 무슨 주의자를 자처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기에, 대부분 흔쾌히 참여의사를 밝혀 주셨다.

 

올해 처음으로 완주를 했다. 여기에는 나름의 꼼수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참여를 독려한 것. 원래 돈 내는 일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걸 금기시했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들을 따로 불러모아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은 모를지 몰라도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차별이 가해지는지 느끼게 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행사에 참여를 한다면 참여하는만큼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참여한 여덟명이 완주에 큰 도움을 줬다. 물론 가장 큰 도움은 평소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시던 필명 산사춘님에게서 나왔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남자로 태어나는 건 10억 정도를 갖고 세상에 나온 것과 같다.” 남성이 오히려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그 돈 다 어디 갔어?”라며 내 말을 비웃지만, 그들도 나처럼 여성학의 세례를 받는다면 “10억이 뭐냐? 100억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성학은 참 좋은 학문이다. 가장 도움이 되는 게 부부 금술이 좋아진다는 것. 설거지를 비롯한 집안일을 분담할 줄 아는 남편을 싫어하는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여성희망캠페인이 보다 많은 이에게 여성학의 기쁨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서 민  단국대학교 교수, 100인 기부릴레이 이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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